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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Mar 08. 2019

바리새인과 나 07
독이 든 빵

바리새인과 나 #07






마 12:30-35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고,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 이는 예수님 당신이 양식이셨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이시기에 역사적으로는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 베들레헴은 집을 뜻하는 ‘베이트’와 빵을 뜻하는 ‘레헴’, 이 두 단어로 만들어진 말이다. ‘빵집’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빵집에서 태어나신 빵이다. 스스로도 당신을 빵이라고 하셨다.

요 6:3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양식이시되 생명의 양식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는다. 그 안에 생명이 가득해져서 만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만족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요일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에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어둠이 사라진다.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으면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생명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으면 모든 사망과 억눌림에서 해방된다. 예수님의 생명에는 성령의 법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그 생명 자체가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은 사람들의 결과다.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결과 중 하나는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는 사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영혼에서부터 역사하여 그 사람은 생명의 약속을 가진, 그 약속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이 전달되고, 예수님을 양식으로 삼는 기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다. 바리새인들도 스스로를 양식으로 자처했다. 성경에서 비롯된 교훈을 전했고, 자기들이 강론하는 계명이 진리의 양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을 양식으로 받는 이들에게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을 양식으로 받는 사람들은 빛을 잃고 어둠에 뒤덮이게 되었다. 눈이 멀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돌멩이를 치켜들고,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가득했던 제자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바리새인들을 양식으로 삼은 사람들에게서는 어둠과 사망이 미친 듯이 역사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두 양식 사이에 있었기에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생겨났을까?


성경은 자주 바리새인들을 독사로 표현한다. 마태와 누가는 세례 요한의 입술을 통해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한다.(마 3:7, 눅 3:7) 세례를 받으러 오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환난을 피하라고 하더냐?”하며 호통친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며 호통을 치신다.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심지어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지옥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도대체 바리새인들은 왜 독사가 되었을까? 그들은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 비판하고 죽이는 사망의 사도들이 되었을까?


바리새인들 말고도 성경에서 독사로 표현된 사람이 있다.     

시 58:1-5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성경은, 마땅히 말해야 할 정의를 말하지 않는 리더들, 마땅히 올바로 판결해야 할 때 굽은 판결을 일삼는 통치자들을 ‘독사’라고 표현한다. 이들의 특징은 결코 타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의롭고 바른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악한 생각에만 집중한다. 그 결과 구부러진 판단을 하고 그 입술로 죄악을 쏟아놓는다.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길로 걸어간다.

시 140:1-5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올무와 줄을 놓으며 길 곁에 그물을 치며 함정을 두었나이다

성경은 악인들, 포악한 자들을 ‘독사’라고 표현한다.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 특히 싸우기 위해서 매일 모이는 사람들, 누군가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람들, 누군가를 제거하기 위해 올무를 놓고 줄을 놓고 그물을 치며 함정을 만드는 사람들(제발!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기를.).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독사’라고 부른다.

사 59:1-5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이사야의 말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말씀과 법에 따라 의롭게 진실하게 판단하지 않고, 늘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이로운 대로만 판단하는 사람들, 이들은 결국 죄악에 젖어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손길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고, 그들의 행동은 모두 악행이고, 그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허상일 뿐이다. 이들이 바로 독사를 낳는 독사들이다.


이들이 공통점이 무엇일까? 이들 안에는 모두 ‘독사의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도 똑같이 그 안에 독사의 독이 들어 있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누룩’으로 표현하신다.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바리새인들 안에는 ‘독사의 독’ 같은 누룩이 있었다. 이 누룩은 그들의 교훈이었고, 또 교만이었고, 그들이 자랑하는 전통들과 업적들과 배경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만과 자랑과 교훈과 업적과 배경과 전통들을 조금만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조금만 받아들였다면, 하나님 나라를 조금만 받아들였다면, 그것이 가루 세말에 들어가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 되어 그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꾸어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양식이셨고, 바리새인들도 양식이었다. 다만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다른 누룩으로 부풀린 빵이었다. 그냥 빵 자체로는 그 안에 든 누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생명인지 독사의 독인지, 독사의 독이 든 빵도 너무나 그럴듯해서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다. 심지어 독이 든 빵인 자신들도, 자기 안에 생명이 들어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안에 생명이 있는지, 독사의 독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전에 우리 교단의 수련 목회자 열두 명이 목회를 포기해야 할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 열두 전도사님들에게는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었다.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들과 죽이려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교단 게시판이 온통 전쟁터가 되었다. 나는 그때 살리는 편에 섰다. 논리에서 계속 이기다 보니 어느덧 살리는 편의 대표처럼 되어버렸다. 반대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비난과 욕설을 들어야 했는지 모른다.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교단에서 높으신 분들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내 목회 생명을 걸어야 했다. 자칫하면 교단에서 목사 자격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기를 겪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우리가 살리려고 애썼던 열두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서 “저 목사님들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는 거지. 우리를 위해서 그러겠어?”하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 실망스러웠다.

그러던 즈음에 전혀 일면식도 없는 한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이 교단 홈페이지에 있는 논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니 누가 옳은지 명백하게 아시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로 격려해 주셨다.

“오 목사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겨도 칭찬받을 일이 아니지만, 살리는 일은 져도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이 목사님을 훌륭하다고 할 겁니다.”

그 한 통의 전화로 갈 길이 명백해졌고, 결국 열두 명의 수련 목회자들은 살아났다. 덕분에 큰 수치도 당해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잘했고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2:33-35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우리는 빵에 독이 들었는지 생명이 들었는지 잘 모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다. ‘과연 나는 지금 선한 것을 내고 있는가? 선한 말을 하고 있는가?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라고 물으며 가만히 내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사람을 넘어뜨리고 죽이려는 말이라면, 선을 추구하는 말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면,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결론을 맺는 것이라면, 아무리 부드럽게 말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꾸미고 대의가 있는 것이라 우겨도, 내 안에 생명이 아니라 독사의 독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나는 누구인가? 생명을 받아 생명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도인가? 독사의 독을 품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분노로 돌을 던지며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바리새인인가? 독사의 독을 품은 바리새인이라고 깨닫게 된다면, 빨리 예수님의 생명을 담을 자리를 마련하자. 빛이 어두움을 이기며 천국의 누룩이 세 말의 가루를 온통 부풀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빛이 비쳐 보게 되고 생명을 살리는 사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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