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태현 Mar 15. 2019

바리새인과 나 08
재활용 불가

바리새인과 나 #08


눅 5:30-39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제는 더 이상 쓸 데가 없어 버리는 것을 ‘쓰레기’라고 한다. 이 ‘쓰레기’라는 말은 18세기에 ‘쓸어기’라는 형태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문질러서 쓸 수 없이 부스러진 조각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나중에 빗자루질 등을 할 때 쓰는 ‘쓸다’라는 말과 연결이 되어서 청소해서 쓸어낸 먼지나 망가져 못 쓰게 된 물건들을 두루 일컫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가 쓰레기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고 한다. 그냥 창밖으로 오물을 버렸기 때문에 그 쓰레기가 악취와 전염병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민들에게 쓰레기를 치우는 의무를 부과했고, 나중에는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건물의 주인들에게 의무적으로 쓰레기통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중에 한 부류가 넝마주이들이었는데, 쓰레기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 그것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골라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요즘 우리는 ‘재활용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나누어 버리고 있다. ‘재활용 쓰레기’는 말 그대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깨끗하게 세척하거나 다시 성형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은 재활용한다. ‘일반 쓰레기’는 ‘일반’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쓸 데 없는 것들을 말한다. 다시 사용할 수 없기에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거나 폐기해야 하는 것들이다.


전에 가르쳤던 학생 하나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나쁜 사람들을 말할 때 그냥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말 나쁜 사람에게는 ‘일반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쓰레기도 다시 쓸 수 있는 게 있고, 다시 쓸 수 없는 게 있는데, 정말 구제불능인 사람을 말할 때는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일반 쓰레기’라고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이 웃었다. 웃자는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면 꼭 웃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모자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든 재활용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삶이 부스러져 이제는 더 이상 재활용이 불가한 삶이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쓰레기처럼 쓸모가 부족하고 때 묻고 오래 묵은 신앙이라도 ‘재활용 쓰레기’ 여야지 ‘일반 쓰레기’여서는 안 되겠다는 말이다.



분명히 쓸모 있는 신앙과 쓸모없는 신앙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방탕한 분으로 매도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리 비판을 해봐도 조목조목 말씀으로 반박하시니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욱 따르고 예수님을 더욱 인정하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미워하던 세례 요한까지 자기들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자기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하니 방탕하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바리새파와 세례 요한이 속해 있던 에세네파는 같은 줄기를 따라 시작되었다. 희랍제국의 종교탄압 정책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율법을 수호하자는 하시딤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사두개파와는 달리 바리새파와 에세네파는 철저한 금욕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키는 금욕주의 전통을 매우 우러러보며 그들의 신앙을 존경했다. 그래서 마치 유대교에는 금욕주의만이 가장 가치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철저한 율법 준수와 금욕생활을 근간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좋은 전통으로 여겨졌다.


바로 그때,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신앙의 형태나 관습, 전통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다. 말 그대로 신앙의 본질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본질적인 새로운 신앙의 시대가 왔다. 새 옷이 입혀졌다. 새로운 포도주가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이들은 낡은 옷이 좋다고 새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새 옷을 가위질해서 다 떨어진 낡은 옷을 기우려고 했다. 가죽부대에 담긴 묵은 포도주가 맛이 좋으니 새 포도주도 낡은 가죽부대에 담자고 했다. 금욕주의나 율법주의가 신앙의 본질이 아닌데, 본질에 형식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본질을 꿰어 맞추려는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주장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주셨다. 낡은 옷에 새 옷 조각이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새 옷을 망가뜨리지 말고, 새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다. 묵은 포도주가 새 포도주보다는 맛이 좋지만, 그 이유가 낡은 가죽부대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편한 옷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 아내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 옷 입고 가게요?” 그 말은 그 옷을 거기에 입고 가면 안 된다는 말이다. 편한 옷이 좋지만 때와 장소와 품위에 맞는 옷이 따로 있다. 아무리 낡은 옷이 편하고 좋다고 해도 그 옷을 입고는 못 가는 곳이 있다. 하나님 나라도 그렇다.


마 22:11-14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 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임금이 결혼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 혼인잔치에 앉혔다.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저 임금님의 은혜로 값없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었다. 이제 기쁨의 잔치를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예복을 입어야 했다. 마땅히 입어야 할 예복을 입으려면 편한 자기 옷을 벗어야 했는데, 낡아빠진 옛 옷을 벗지 못해 새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은 결국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데 버려지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이제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이면서도 단호한 주님의 명령이다. 구태의연한 신앙의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지 않는다면 재활용이 불가한 ‘일반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옛 것은 다 나쁜 것인가? 모두 다 새것으로 바꿔야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포도주는 묵은 것이 새 것보다 좋다. 예수님의 이 평행 구절 중에서도 유독 다른 성경들에는 없는 구절을 누가는 기록해 놓았다.


눅 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낡은 가죽부대는 재활용할 수 없다. 하지만 포도주는 묵은 것이 더 좋다. 옛 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온다고 해서 예전에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중심까지 버리면 안 된다. 지나간 옛 신앙의 형식, 예배, 기도, 헌신 등을 통해 우리가 받았던 은혜와 구원의 은총은 지금도 계속 깊어져만 간다. 이 은혜는 얼마든지 음미해도 좋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크신 은혜는 기억하고 감사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더욱 깊은 신앙의 기쁨을 부어줄 것이다. 그러니 신앙의 행위와 형식이 바뀐다고 해서 이전에 우리가 받았던 은혜들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가치 없이 여겨지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신앙의 은혜는 더욱 가치가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낡은 가죽부대를 버린다고 해서 묵은 포도주까지 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때로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는 것을, 지나온 신앙의 은혜까지 버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해서 낡은 가죽부대를 결사적으로 붙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고는 자꾸만 ‘포도주는 여기에 넣어야 제 맛’이라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려고 한다.



몇 해 전에 내게는 나름 충격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부교역자들과 함께 예배를 준비하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예배에서 부를 찬양 목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교역자들이 찬송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찬송가를 모를 수 있느냐?”라고 질문을 했더니 “안 불러봐서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전도사로 사역할 때만 해도 어린이부, 중고등부, 청년부에서 찬송가를 부른 적이 없다. 게다가 한 동안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운동’이 한국교회에 유행했다. 중고등부나 청년부가 독립해서 자신들만의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힐송교회 같은 외국 교회의 번역곡들로 예배 찬송을 대신했다. 그러고 나서 20년이 넘게 지났다. 다시 말해서 우리 한국교회의 20대 30대 청년과 청장년들은 교회에 찬송가책을 들고 다녀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많은 청년들과 청장년들이 찬송가를 잘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잘 모르는 복음성가를 부르면 마음이 답답하고 때로는 은혜받는 자리에서 소외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잘 아는 찬송가를 부르면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고, 그 찬양의 깊은 은혜에 감동한다. 정반대로 우리의 청년들과 청장년들은 그들이 잘 모르는 찬송가를 부를 때 마음이 답답할 수 있다. 번역된 최신의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드릴 때, 더욱 기도하고 더욱 감동받으며 예배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 기성교회에서 청년들과 청장년들이 사라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교회에서 사라진 청년들과 청장년들이 ‘마커스’나 ‘어노인팅’ 같은 찬양집회에 미어터질 듯 모여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가 낡은 옷과 가죽부대를 붙들고 있기에 마땅히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할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다른 곳에서만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율법이 중요한가? 그들은 자기들이 따르던 오래된 전통과 신앙의 방법이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따르던 그들에게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이루어졌어야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전통과 신앙 방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바람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다. 우리도 혹시나 그런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은혜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찬송가든 복음성가든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통성기도를 통해서만 열정적인 영성을 갖게 된다거나 관상기도를 통해서만 영성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리 질러 기도하든 묵묵히 기도하든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공부를 통해서만 하나님 뜻을 안다거나 제자훈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공부든 제자훈련이든 사람을 온전하신 뜻대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이렇게 예배해야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거나 이렇게 찬송해야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고, 이렇게 기도해야만 성령이 역사하시고 이렇게 전도해야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신앙이다. 그 모든 것은 폐기될 때가 오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처럼 오래 묵어 시대에 적용할 수 없게 되어 폐기될 수도 있는 형식과 방법에 얽매여 신앙까지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 묵은 포도주는 좋은 것이다. 그 본질과 내용인 포도주에 집중해야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된다. 껍데기인 낡은 가죽부대에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혹시라도 자꾸만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어야 한다고 우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본질에 집중함으로써 마땅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새 예복을 준비하고 있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바리새인과 나 07 독이 든 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