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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Mar 22. 2019

바리새인과 나 09
앞으로 한걸음 더

바리새인과 나 #09




막 7:1-8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내 아내는 운전을 곧잘 한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탔을 때는 정말 많이 불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내는 운전은커녕 운전면허조차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반대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었다. 아내가 운전한다는 사실을 마음 편히 미더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아내의 운전을 반대했었다. 시골에서 목회를 하면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아내에게 운전면허 시험을 보라고 권했다. 아내는 곧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운전연습을 위해 오래된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아내가 운전하던 자동차의 이름은 ‘흰둥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진주색 자동차였지만, 우리 가족은 그 차를 그냥 흰둥이라고 불렀다. 아내는 흰둥이를 몰고서 여기저기 잘 다녔다. 내가 잠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아내는 혼자서 혹은 아이들을 태우고 꽤나 먼 곳들을 여러 번 다녀왔다. 몇 번 장거리 운전을 하고 나서는 더 운전을 잘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더 편해지고 아내는 더 자유로워졌다. 내가 수술을 받았을 때도 아내가 직접 운전해서 나를 병원에 입·퇴원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가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다녀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것이 못 미더워서 아내가 운전하면 안 되는 많은 이유들을 만들었었다.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워서, 아내는 겁이 많으니까, 내가 운전하면 되지,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까.’ 등등. 그러나 그 이유들은 하나같이 반대를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그런 반대를 위한 구실들로 나는 아내가 조금 더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막고 있었던 셈이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잘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한 발을 떼어야 할 때는 주저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주저해야 할 이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지 설명한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불러오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앞으로 나아가는 나라다. 뒤로 물러나거나 뒤를 돌아보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성도들은 결코 뒤를 돌아보거나 옆을 살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소에 멍에를 메우고 밭을 갈다보면 초보자들은 밭을 똑바로 갈기가 어렵다. 삐뚤빼뚤 엉터리로 밭을 갈아놓는다. 밭고랑을 낼 때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비뚤어진다. 밭고랑이 비뚤어지면 이랑 위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기가 많이 불편해진다. 그래서 숙련된 농부들은 밭고랑을 곧고 바르게 만든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농부는 소를 몰 때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앞의 한 지점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를 몰아간다. 그러면 고랑은 저절로 직선이 된다. 예수님은 천국도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오직 그 나라만 바라보며 걸어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간다고 하면서 자꾸만 세상과 세상의 이치를 바라보면 결코 하나님 나라로 올바로 갈 수 없다. 처음에는 갈팡질팡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방향을 잃고 만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원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 나라로 가지 말아야 할 이유만 많이 생겨난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 안 되는 이유를 정말 많이 가지고 있었다.


막 7:1-5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기에, 시장에서 돌아와도 물을 뿌리지 않기에,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지 않기에, 정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기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정한 사람들이고, 예수님은 따르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바란다고 했지만, 사실 그들은 ‘지금 이대로’가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기들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이미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고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틀린 것으로 규정해 버렸다. 조금만 자기들의 규정에 맞지 않은 것 같으면 틀린 것이었고, 심지어 하나님이시라도 자기들이 정해놓은 법에 어긋나면 정죄해 버리는 오류에 빠졌다.


맨 첫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즉각적인 순종’이라고 말한다.


막 1:1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인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곧’ 예수님을 따라갔다. 심지어 그들의 생명과도 같은 그물을 버려두고 말이다. 어부들인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버려두고 ‘곧’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말은, 마치 아브라함이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면 즉시, ‘곧’ 방향을 바꿔 주님을 따랐다.


여기서 ‘곧’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유뒤스’라는 말인데, 이 단어의 뜻은 ‘곧은’, ‘곧’, ‘즉시’, ‘바로’, ‘곧바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의 뜻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즉시로 순종하여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곧은길’, ‘바른 길’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마태와 마가, 누가가 쓴 모든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외침,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는 말씀에 “곧게”에도 바로 이 ‘유뒤스’가 쓰였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를 향한 ‘즉각적인 순종’이 ‘똑바른 길’이라는 해석은 결코 틀리지 않다. 그리고 이 단어는 마가복음에서만 무려 마흔 번이나 사용된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 순종해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바로 그다음에 나오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세베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마가복음이 소개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옆이나 뒤를 바라보거나, 여러 가지 이유를 달지 말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독일의 뇌과학 박사이자 과학 전문 칼럼니스트인 프리트헬름 슈바르츠(Friedhelm Schwarz)가 쓴 ‘착각의 과학’이라는 책에 보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원하게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는 자신의 마음 상태나 외부적인 요인들 때문에 자주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신감이나 잘못된 믿음, 경험에 대한 지나친 의존, 손실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우리는 자주 착각한다. 또 색깔이나 소리, 냄새, 시간, 호감도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에 잘 속기 때문에 생각의 오류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슈바르츠는 이런 착각들과 생각의 오류들 속에서 우리가 올바르게 결정하려면 몇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훈련의 첫 번째는 ‘어떤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이 것이 우리가 올바로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되는 첫 번째의 훈련이 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무언가를 결정함에 있어 방향이 없다면 아예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큼의 성취를 했는지, 얼마나 바르게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진즉에 어떤 결정을 했다고 해도 사실 결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무의미한 결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옷을 한 벌 사러 갔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입고 갈 옷인지, 어느 옷과 맞춰 입을 것인지, 내 피부 색깔하고 잘 맞는지 꼼꼼히 따져본 후에, 입고 거울을 보며 전체적으로 어떤지를 본다. 털털한 성격인 사람들은 이 정도 고른 후에 옷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조금 꼼꼼한 사람들은 옆에 있는 가게에 가서 더 좋은 가격에 더 좋은 옷이 있는지 확인한다. 더 꼼꼼한 사람들은 이미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확인할 옷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두었다가 위의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가격을 비교하고, 다시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더 저렴하게 옷을 사기도 한다.


온 한 벌을 사 입는데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옷을 사는 사람에 따라 결정의 과정이 매우 신중하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 옷을 입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충실했다면 결국 어떤 결정이든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교복을 사러 갔으면, 교복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라인이 어떻든 소재가 어떻든 결국 학교에 잘 입고 다닐 것이다. 잠옷을 사러 갔으면 색깔이 어떻든 디자인이 어떻든 집에서 잘 입고 잘 것이다. 하지만 과정에만 집중해서 목적이 바뀌면 그건 큰 문제다. 매일 잠옷을 입고 학교에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목표에 따라 수칙이 바뀐다. 목표가 똑같더라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수칙은 바뀔 수 있다. 때로는 그 목표에 다다르는 방법과 시간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수칙에 따라 목표를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얼마든지 잘못된 믿음이나 두려움 같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속아서, 또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동의하는지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 따라서, 우리의 목표를 바꿀 가능성을 가진 바리새인이기도 하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뒤를 돌아보거나 주변을 돌아보지 말고, 본질적인 목적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가자. 멈추어 서서 과정과 방법에만 몰두하고 있었다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즉시 순종하자. 그러면 조금 흔들리거나 약간 비뚤어질지언정 시선만 떼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앞으로 한 걸음씩만 더 나가면 늦어질지언정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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