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나 #10
눅 6:7-1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고등학교에 다닐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몰두해서 읽었다. ‘에밀 싱클레어’라는 한 청년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인생과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흑백의 세상에 살고 있었던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세상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흑백의 논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나가고, 옳고 그름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해석한 내용은 그렇다.
소설 ‘데미안’에서 최고의 백미는,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날아가는 매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냈을 때,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책에 쪽지를 꽂아서 답장해 주는 장면이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하나님을 향해 날아간다. 그 하나님은 ‘아브락사스’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청년 싱클레어는 정욕과 금욕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때 피스토리우스 신부를 만나 ‘아브락사스’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인간의 흑백논리와 이원론적인 개념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나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게는 빛이나 어두움이나 매한가지다.
시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마치 시편의 기자가 이 말씀을 깨달은 것처럼, 싱클레어는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져 있지 않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는 억눌림과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완벽하게 옳은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중생을 체험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체험을 하면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 신부와 결별을 하게 된다. 피스토리우스 신부는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장본인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과거의 종교의식에 사로잡혀 그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그런 피스토리우스 신부의 모습을 정확히 판단하여 그에게 충고한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 신부는 결국 싱클레어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오기는 했지만, 껍질을 손에 들고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결국 날아오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당시의 사람들은 정말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것,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을 그들은 보고 들었다. 예로부터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어 했지만,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나에게는 꿈에도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 바로 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가 보는 것이다. 그 안에 말구유에 누워계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도 가 보고 싶고, 풍랑 이는 호수를 잠잠케 하시는 그 배 위에도 가 보고 싶다. 그 모습, 그 음성, 그 말씀을 직접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그들은 정말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어떤 스승보다도, 그 어떤 지혜자 보다도 좋은 스승이시고 지혜로우신 주님.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진리 그 자체이신 하나님. 그 예수님께 듣고도 바뀌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바뀔 수 없는 아집과 교만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다. 전혀 가망이 없다.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껍질, 옛사람과 옛 세계를 깨뜨려야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껍질 너머의 하나님을 바라봐야만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날아갈 수 있다. 하지만 껍질을 깨고 나왔다 하더라도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껍질만 쳐다보고 있다면, 껍질 속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나 매한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삶이 변했다. 껍질을 뚫고 나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 나라가 자기들 눈앞에 있는데도 껍질을 손에 들고 그 껍데기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었던 껍질이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였다면, 바리새인들이 들고 있었던 껍질은 그들이 가진 율법이었다.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마치 피스토리우스 신부가 과거의 종교예식에 집착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에게는 형식과 제도가 그들의 껍질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세상에 오셔서 그 껍질을 깨뜨려주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본질보다는 형식, 선한 일보다는 자기들이 만든 제도가 훨씬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안식일이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더 중요한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덜 중요한, 아니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껍질을 손에 들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다고, 혹은 그 껍질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우기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다.
눅 6:9 ...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과 죽이는 것보다 옳은 일인 것은 그 날이 어떤 날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 날이 안식일이든 다른 날이든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항상 옳다. 그런데 이들은 얼마나 껍데기에 집착하고 있었는지, 가장 기본적인 진리조차 외면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마다 다 다른 각각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양복을 입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는 것을 좋아한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공부하고 일하고 살면 좋을 텐데, 우리는 때에 맞춰 입는 옷을 정해놓았다. 무슨 법이 있는 것은 아닌데, 그냥 우리들 모두가 그런 형식에 암묵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그것을 어느 정도 지키며 살아간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그런 형식이 주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본질과 형식이 부딪칠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과 악의 문제나 죽이고 살리는 문제라면 그때에도 정말 우리가 만들어 놓은 형식을 따라서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고치셨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이 회복되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환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어느 시대든, 어떤 장소든 잘한 일이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바리새인은 그 일이 잘한 일이나 좋은 일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났다.
눅 6: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그냥 화만 난 게 아니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려고 의논했다. 우리는 저 ‘어떻게’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했다.
껍데기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껍데기를 자기 자신한테만 적용하지 않고 타인에게도 적용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껍질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에게 씌운다. 그리고 그 껍질 속에 속박되지 않으시고 자유로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낙인찍었다.
눅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형식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여러 번 예수님께 자기들의 율법과 전통이라는 껍질을 씌워봤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그 범주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자기들의 전통과 율법이라는 껍질에 예수님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예수님을 고발해서 법으로라도 자기들의 전통과 율법 아래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우리는 이해가 안 된다. 당연히 예수님은 옳은 일을 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형식에 예수님을 옭아매려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리새인들이 바로 나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마치 장기를 두는 사람들보다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에게 판세가 잘 보이는 것처럼, 예수님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잘 보이는데, 정작 우리가 지금 나의 껍질을 들고서 하고 있는 일은 잘 못 본다. 정직하게 면밀히 관찰해 보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바리새인들이 한 일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다.
우리의 입술로 정죄하고 있는 그 사람이 정말 그런 사람일까? 내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정말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되는 것일까? 사람보다 안식일이 더 중요할까? 사람보다 내 기준이 더 중요할까? 주님의 뜻이 우선일까, 아니면 나의 판단이 우선일까? 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
우리는 때로 내 가치관을 하나님 나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껍질을 뚫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날아가야 하는데,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은혜를 따라 그 껍질을 깨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 가치관을 들고 서서 하나님 나라를 재고 있다. 그 교만이 얼마나 큰지, 그 잣대로 이웃을 정죄하고, 교회를 정죄하고,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정죄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껍질을 깨고 나오면 미련 없이 그 껍질을 버려야 한다. 그 껍질 안이 아무리 포근하고 좋았어도 계속 그 껍질 안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껍질을 깨고 나온 다음에는, 다시는 그 껍질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지금 어떤 껍질을 손에 들고 집착하고 있는지 판단하고, 그 껍질을 내던지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