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 낭비되는 시간

by 익준

최근 대선을 앞뒀을 때 일이었습니다. 유권자로서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는 알아야 했으므로, 몇 개의 영상을 찾아보는 중이었습니다.

그와중에도 저는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A정치인에 긍정적 뉴스를 하나 봤다면, 부정적 뉴스도 하나 찾아보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하면 알고리즘이 균형을 이루지 않을까, 하는 방어 기제였습니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이미 한 발 빨랐습니다.

어느 날, 유독 말을 재미있게 하는 유튜버의 영상을 몇 개 눌러본 이후부터, 비슷한 영상들이 꼬리를 물고 추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화면을 내릴 때마다 비슷한 문장, 비슷한 표정, 비슷한 논조가 반복되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클릭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선택이 아니라 유도된 반응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몇 잔이나 마셨을까,

자연스레 흘러나온 정치 이야기에 저는 얼굴까지 붉히면서 A 정치인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정치 이야기를 피했을 텐데, 그날은 목소리 톤까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스스로 봐도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제 안의 틀을 바꿔놓은 걸까요?


Mokhberian(2020)은 ‘뉴스의 도덕적 프레이밍’ 연구에서, 뉴스가 단어 선택과 문장 구조를 통해 독자에게 특정한 도덕 감정의 방향을 암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뉴스가 악의를 가지고 보도한다면 독자들에게 편향적 생각을 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편향된 정보에 노출되다 보니, 생각의 회로가 한 쪽으로 왜곡되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주입한 프레임 안에서 사고 하고 있었던 겁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일방적으로 흘렀습니다. 매체는 신문과 TV, 라디오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 마저도 모두 같은 뉴스를 전했죠. 그래서 ‘정보의 편향’보다는 ‘정보의 부재’가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지금은 같은 뉴스를 보는 사람을 찾기 힘듭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개인에게 맞춰진 맞춤형 뉴스를 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죠. 즉 ‘나를 위한 진실’이 따로 존재하게 된 겁니다.


에코 챔버(Brugnoli et al., 2019)는 확증편향에 따라 선호하는 정보만 반복 노출될 때 동조 집단이 형성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동조집단 안에 소속된다는 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안정감을 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른 의견을 접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합니다. 결국 ‘생각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자신의 확신을 강화해주는 정보만 취사 선택해 학습할 뿐입니다.


뉴스가 절대적인 정보 제공자의 위치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는 것 처럼 보입니다. 구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보도하는 것이 남아 있는 구독자를 지키고, 이탈을 막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인간은 세계 안에서 존재하며, 그 세계를 해석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세계를 해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되려 세계가 우리를 해석하고 있죠. 뉴스 피드의 알고리즘이, 유튜브의 추천 영상이,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이해하고, 어떤 감정을 유도할지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사유의 주체는 교묘하게 전도됩니다.


‘내가 뉴스를 보는 것’에서 ‘뉴스가 나를 만든다’로 변하는 것입니다.


정보의 과잉은 진리의 상실로 이어진다.
- 한병철, 투명사회 -


비판적 시각을 잃은 채 뉴스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세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되려 해석당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정보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뉴스가 아니라, 적당한 거리감입니다.


그 거리는 냉소나 회피가 아니라, 스스로를 재정렬할 시간을 의미합니다.
반응적으로 수집하는 뉴스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놓고, ‘정보의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잠깐의 침묵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우리는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보다 ‘누가 나를 이렇게 믿게 만들었는가’를 물을 때, 주체적 시간이 시작 됩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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