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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원 Dec 23. 2018

<김사원 표류기>

#8. 서울의 달

대한민국의 젊은이로 사는 것만큼 빡센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

문득 옛날 생각에 빠져든다.

되짚어보니 내가 서울에 상경한지도 만으로 11년이 다 되어간다.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서울이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고, 운이 좋게도 나는 서울 소재 대학교에 합격하여 상경하게 되었다. (어쩌면 불행일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꿈꿔왔던 서울살이는 녹녹지 않았다. 아니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고달팠다.


내가 타지에서 밥이라도 거를까 봐 걱정이 되셨는지 우리 아버지는 내게 하숙집에서 지낼 것을 강요하셨었고, 

2007년 2월 말에 나는 그렇게 하숙집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였다.

처음 내가 서울에 올라와서 살던 곳은 학교 쪽문 마을버스 종점 근처로, 경사가 매우 가파른 달동네에 위치한 하숙집이었다.

하숙비는 한 달에 40만원이었는데 아침과 저녁밥이 제공되었다. 

하숙집을 묘사하면 옛날식 2층 건물로, 계단은 매우 가팔랐고 건물 외벽에 붙어있었으며 계단 벽이 없어 매우 위험했다.

방과 방 사이에 샤워호스만 달려있는 옛날식 부엌에서 세면과 샤워를 해결했는데, 샤워를 할 때마다 옆방 형이 혹여 들어올까봐 눈치를 보며 황급히 씻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씻는 것보다 단연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였다.

화장실이 건물 밖에 있었는 데, 안타깝게도 쭈그려 쏴 변기만 덩그러니 존재했었다.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살면서 앉아쏴 외에는 생리현상을 해결해본 적이 없던 나는 큰일을 학교에서 해결하고 왔었는데 한 달 가까이 이 짓거리를 하니까 변비가 생겼다.  


재래식 화장실에 질린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 달 만에 하숙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학교 정문 근처에 있는 고시원에 살기 시작했다. 

원래는 2개였던 방을 하나로 합쳐서 조금 더 크게 만든 고시원의 방 크기는 대략 2평 남짓했던 것 같다. 

고시원의 내부는 매트리스 발 밑의 위를 책상 합판이 덮는 형태로 1인용 냉장고 위까지 이어지는 맞춤형 가구가 존재했었는데, 나름 혼자 살기에는 만족스러웠다.

이유인즉슨 이곳 월세가 36만원인 데다가 다행스럽게도 화장실에는 앉아쏴 변기와 현대식 샤워부스로 잘 정비가 돼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흰밥과 김치는 상시로 제공이 돼서, 아침잠이 많아 하숙집에서 밥을 자주 걸렀던 내게는 이쪽 옵션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물론 가벽을 뚫고 오는 옆방 소리나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장실과 샤워부스가 있기에 충분히 참고 지낼만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부족한 부분은 존재했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나는 동기 또는 선배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고 늦게까지 놀다 보면 동기들이 잠을 재워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몇 번 내가 사는 고시원에 동기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2평 남짓한 방에서 20대의 남자 새끼들이 부대껴있는 것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는 것을 그때 제대로 경험했다. 

결국, 나는 고시원에 살아서는 동기들과 재밌게 놀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때 번 돈으로 자취방을 얻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이전 세입자가 집주인과 협상을 잘해둔 덕분에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계약을 하게 되었는데, 조건이 보증금 100 월세 30의 지하방이었다.

방 크기는 대략 9평 정도로 그전에 살던 모든 주거지를 박살 내는 스케일이었으며, 화장실도 앉아쏴 변기로 세팅되어있었고 개인 부엌도 있었기에 그토록 꿈꿔왔던 자취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하방이었기에 동기들이랑 밤새 시끄럽게 놀아도 될 만큼 방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늦게까지 놀다가 자도 될 만큼 공간이 여유로웠기에, 제법 많은 동기들이 우리 집에서 술판을 벌이고 자다가는 날이 종종 있었다. 덕분에 이 집에서 재밌는 추억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지하방에도 단점은 존재했었다.

집에 해가 들지 않아 어둑어둑해서 시간관념이 사라졌으며, 움집과도 같았기에 눅눅해서 매 순간마다 제습기가 풀로 돌아갔다. 

또한 집에 환기가 잘되지 않아 공기도 굉장히 탁해서 잠을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고 계속 늘어져만 갔다.

물론, 1학년 새내기의 막가파식 귀차니즘도 존재했었지만 그래도 피로가 잘 풀리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6개월 정도를 지내가다 군대를 가게 되었다.


이 이외에도 나는 서울 노량진 연립주택, 연희동 반지하방, 성수동 2층 연립주택, 동자동 빌라 5층, 현재 영등포 빌라까지 무수히 많은 곳을 이사해오며 서울생활을 이어왔는데, 그동안 내가 소모성 비용인 주거비로만 쓴 비용이 대략 3100만원이 되는데, 썩 만족스럽지 못한 서울 생활이었다.

 

서울의 청년 주거빈곤율이 36.3%라고 한다. 많은 젊은 지. 옥. 고 표류자들이 여전히 최소한의 주거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부에서 서울만 고집하는 청년들이 문제라고 꼬집어 비판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그 이전에 서울 외에 마땅히 일할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한 편향된 일자리 문제와 청년 고용률에 대해서는 왜 꼬집지 않는 것인가?

게다가 무수히 남발하는 부동산 정책은 또 어떠한가? 

턱없이 부족한 청년 임대주택의 수, 내 집 마련을 위해 맞벌이를 선택한 부부에게 합산 소득을 대출 조건으로 삼는 방식이며, 가계부채를 고려해 더욱 까다로워진 LTV, DTI 등 돈 없고 빽 없는 무주택자인 내게 현재의 부동산 정책들은 제3세계의 것이다.

언제쯤 내게도 내 집이 생길까?

달팽이도 태어날 때부터 집이 있다고 주택공사도 포스터로 떠드는 이 마당에, 만물의 영장 인간인 우리는 이리도 높은 주거 빈곤율과 무주택 비율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오늘도 서울의 밤은 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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