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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원 Nov 25. 2018

<김사원 표류기>

#4. 김 계장

나도 이제 어느덧 회사에 입사한 지 만으로 4년이 다 되었다.

꿈을 좇겠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만 같았던 20대 후반의 허풍쟁이는 이제, 현실을 자각하고 회사가 주는 녹에 감사함을 가진 30대 초반의 사회인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해버렸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나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싶었다. 그냥 그게 내 곤조였다.

하지만 딱 한 사람만큼은 멋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 발령받았던 부서의 김 계장님이셨다.

그의 존재는 진흙 속에 피는 꽃과도 같았다.


여름 어느 날, 퇴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날이 있었다.

본부장님은 갑작스러운 비에 적잖이 당황하셨는지, 급하게 우산을 찾고 계셨다.

각 팀을 돌아다니시면서 여분의 우산이 있는지 물어보셨었지만 갑작스러운 비였던 탓에 여분의 우산이 있을 리 만무했고, 각자 자기가 쓰고 갈 우산이나 겨우 있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불편한 상황이 지속되던 그 순간, 김 계장님이 본부장님께 살포시 우산을 건네셨었다.

본부장님은 우산을 받으시고는 김 계장님께 우산이 있는지를 되물으셨었는데...

"본부장님께서 비 맞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라고 되받아 치셨다.

그리고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제스처를 취하면서 분위기를 위트 있게 만드셨는데,  결코 이 상황이 상사에게 점수를 따려고 알랑 방울을 흔드는 모습처럼 비치지 않았다.

나와 나의 동기는 감탄을 금치 못한 채 한동안 그 장면을 넋이 나가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하루는 회사 송년회가 있는 날이었다.

예식홀을 하나 빌려 올 한 해 전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다음 해 회사의 번영을 기리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 직원의 칼퇴를 방해하는 공식적인 회사 세리머니가 있는 날이었다.

송년회에는 당연히 회사 오너의 취향을 고려한 불편한 장기자랑이 기획되었다.

처음, 식에 입장과 동시에 전 직원들은 각자 순번표를 배급받았다.
그리고 식이 진행되고 드디어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는데, 최초에 배급한 순번표를 즉석에서 뽑아 번호가 나온 사람이 장기자랑을 해야만 했었다.

하필 공교롭게 이때도 우리 본부장님이 들고 있는 번호가 호명되었는데, 난색을 표하시는 본부장님의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단상 위로 올라가신 본부장님께서는 애창곡 번호를 누르기 전, 몇 가지 멘트를 하셨는데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는 애창곡을 부르기 시작하셨고, 분위기가 다운되려는 찰나,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마징가Z와 같은 기상으로 김 계장님이 급하게 단상으로 달려가셨다.

김 계장님은 마이크를 하나 더 구해와서 본부장님과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셨는데, 그때 본부장님은 깊고 짙은 어둠을 밝히는 구세주의 등장에 대단히 흡족하고 만족한다는 듯 표정을 지으셨다.

다행히도 분위기는 더 이상 다운되지 않았고, 나름 흥을 유지한 채 다음 순번에 해당하는 직원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이때도 나와 내 동기는 감탄을 금치 못한 채 한동안 그 장면을 넋이 나가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인간은 머릿속으로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행동들을 몸소 실천하시고, 분위기를 뛰우기 위해 노력하시는 김 계장 님의 에너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에피소드에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회사생활에서의 아첨이나 정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위트(wit)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불편한 자리고, 불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 계장님은 결코 불편하게 상황을 만들지 않았으며, 김 계장님 만의 위트로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는 것이 내겐 인상적이고 멋있다고 생각되는 포인트다.


그렇다고 김 계장님이 일은 못하는 가? 절대 그렇지 않다.

김 계장님은 일도 잘하신다. 단연컨대 우리 회사 No.1이라고 말하고 싶다.

담당하고 계신 업체에서 언제나 교육을 요청할 정도로 유능하셨고, 다른 본부에서 난색을 표하는 업무도 본부장님이 우리 본부에서 하자고 지시를 내리면 불철주야 두말없이 처리해내는 불세출의 영웅과도 같은 분이시다.

또한 후배들에게 좋은 사수로서 업무도 잘 가르쳐주시고, 후배가 싼 똥도 마다하지 않고 잘 처리해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김 계장 님 밑에서 일을 배운 내 동기는 나름 회사의 에이스로 성장하였다.

찬양 일색으로 도배되었지만, 어쨌든 회사를 다니면서 멋있다고 생각이 든 선배에 대한 존경을 가볍게만 적고 싶지는 않았다. 


4년의 시간은 짧다면 짧지만, 회사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던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불만보다 존경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모든 선임자들을 다 존경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가짜 야근과 가짜 주말출근으로 수당만 챙겨가는 가짜들은 여전히 증오한다.

후배들의 입장이나 고충은 무시하고, 자신만의 개똥철학으로 무장되어 훈계질 하는 아가리 파이터도 여전히 증오한다.


새벽이다. 

오늘의 시작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그렇다고 어제의 끝이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시점.

회사의 갓 입사한 20대의 어제를 지나 쓴맛을 조금 알아가는 30대의 오늘은 맞이한 채, 홀로 푸념을 끄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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