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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Nov 11. 2019

여행과 Rain, Steam and Speed

나의 삶에 ___이 배달되었다.

Rain, Steam, and Speed - The Great Western Railway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여행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 내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야만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전적인 의미로서 여행이 정말 여행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모든 질문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분명 저마다 경험한 여행을 통해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누가 나에게 ‘당신에게 여행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상실(소진)하는 잔혹한 과정’이기에 여행을 통해 ‘산화한 소실분을 채우는 것(회복)’이라 말하고 싶다.


상실과 회복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몇 해 전 겨울, 무력하게 아버지를 잃었다. 딱 1년 정도 지난봄, 아버지를 너무도 그리워하셨는지 할머니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6년 동안 간절히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졌다. 방황하는 나는 갈피를 못 잡고 격렬히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고 그 절망감에 견딜 수 없었다. 막막했다.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로 무기력하게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주먹을 꽉 쥐었지만 손안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실로 인한 고통의 굴레가 너울 같이 휘몰아쳤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리 힘든 나날을 보내며 살아왔어도 한 번도 실의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희망은 있다 믿었고 인생은 나의 믿음에 보답해 주었다. 그동안 문제들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선 나약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상실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생채기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상처는 깊어만 갔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고 난 후, 초라한 나와 벌거벗은 채로 마주하고 말았다. 무기력한 부끄러움은 때론 절망이 된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떠나고 싶었다.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예전부터 주변의 권유도 있었고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에 당장 시작하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내 힘으로 일어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곳이 아닌 곳이 필요했다. 그날로 6년이 넘게 몸 담았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딱 5개월이었다. 준비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쌓여서 마지막까지 줄다리기하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렇게 숨 가쁘게 몰아 대던 짧은 시간은 다시 실패의 상처로 나에게 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 섰다.


그때 나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 지는 여행밖에 없었다.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 유럽으로 도피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생경했고 여러 가지 불편함마저 그것 그대로의 매력이 있었다. 며칠 동안은 정신이 없어서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이 좋은가 싶었다. 하지만 익숙한 시간이 늘자 공허감이 상처를 무작정 덮고 있던 누더기 같은 마음의 밑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결국에 다시 빈 껍데기인 나로 돌아왔다.


공허한 눈빛을 한 텅 빈 이방인은 닻을 잃어버려 정박할 수 없는 배처럼 정처 없이 타국을 부유하고 흘러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 누구도 볼 수 없는 투명한 상처를 부여잡고 번잡스러운 소음과 사람들을 피해서 여기저기 떠돌다 ‘National Gallery’에 한 그림 앞에 발을 멈추게 된다. <Rain, Steam and Speed – The Great Western Railway> (1844) - J.M.W. Turner. 두 시간 남짓 내 몸은 굳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주변에 수많은 인파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요했다. 왈칵 한 번만 눈물이 터지면 참지 못할 것 같아 있는 힘껏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럼에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어스름한 아침, 몰아치는 비와 자욱한 안개 그리고 기차에서 뿜어내는 증기가 뒤섞여 세상은 희미하고 모호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혼란을 가르며 기차는 힘차게 돌진한다.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따라 묵묵히 속도를 낸다. 저 뒤에서는 곧 사라질 안개를 뒤로하고 태양이 떠오르려고 한다. 템스 강은 무심히 흐른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론 안개와 증기가 낀 듯 혼란스럽게 막막한 앞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사라질 것들. 난 그냥 저 기차처럼 내 길을 묵묵히 힘차게 가면 되는 것이다. 그림이 말했다. 당신 괜찮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우니 애쓰지 말아라. 정말 괜찮다. 깊이를 알 수 없던 공허에 일부가 그렇게 채워졌다.


난 여행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내 삶에 위로가 배달된 이 마법 같은 순간을 꼭 말한다. 여행은 잔혹한 삶의 고통을 회복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떠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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