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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자부심

독일 베를린, 베를린 필하모니

by 김태희
유럽에서 극장을 경험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그 나라의 예술을 온전히 체득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니까. 미국이나 영국에 가면 뮤지컬을, 유럽에선 오페라를 봐야 한다는 배낭여행족의 불문율(!)은 사실 공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극장에 간다는 것, 그곳의 극장문화를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이해는 되지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독일 뮌헨까지는 기차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데, 같은 독일인 뮌헨에서 베를린은 고속열차 이체(ICE)를 타고도 여섯 시간이나 걸린다. 기차 시간표를 보고는 일찌감치 마음을 비우고 책 한 권에 의지해 열차에 올랐다. 로밍도 안 했고, 데이터 사용도 잠가두었으니 예전만큼 스마트폰을 자주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음악을 틀고, 책을 읽었다. 기차가 가는 길을 따라 날씨가 시시각각 변했다. 소나기가 쏟아지다가,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다가, 구름이 가득 끼기도 했다. 한국에서 읽다 말고 챙겨 간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마저 읽었다. 지금 상황에 아주 적절한 글귀가 마음을 치고 들어왔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쪽이질 않은가.”


베를린 텔레비전 송신탑(Berliner Fernsehturm)


이렇게 오랜 기간 유럽을 여행하는 건 처음이지만, 베를린은 두 번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에 온 적이 있다. 한동안 내게 ‘유럽’이란 독일 베를린과 동일시하게 되는 단어였다. 열흘 동안 이곳에 묵으며 경험한 사람들, 음식, 문화 등 모든 것이 짧지만 강렬한 경험으로 남았다. 그래서 기차에서 내려 베를린에 발을 디뎠을 때, 낯설다기보다는 어쩐지 그리워하던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중앙역에서 보았던 풍경, 그 당시 묵었던 호텔이 자리한 알렉산더플라츠(Alexanderplatz), 그 뒤로 보이는 텔레비전 송신탑까지 모든 것이 반가웠다.


나는 독일을 떠올리면 곧잘 '클래식 음악'으로 연결하곤 한다. 독일의 문화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몇 년전 내한했던 뮌헨 필하모닉의 연주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독일의 날씨와 독일 교향악단의 음악은 아주 잘 어울린다. 아니 어쩌면 똑같다. 그래서 중앙역에 내리자마자 베를린 필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오늘 저녁에 베를린 필 콘서트가 있다고 했다.


포츠다머 플라츠 역


가는 법을 듣기는 했지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초행길이니 당연할 테다. 일단 들은 대로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에 내렸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손에 든 지도와 풍경을 대조해가며 조금 헤매고서야 베를린 필하모닉의 집,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e)에 도착했다.


베를린 필하모니
베를린 필하모니 옆 카머잘(실내악 전용홀)의 모습 (c) Wikipedia


악단의 이름과 ‘ㄱ’ 한 글자 차이인 베를린 필하모‘니’는 베를린 필하모닉(Berliner Philharmoniker)이 상주하는 전용 콘서트홀이다. 1963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도로-그는 1955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다-건설한 새 공연장이다. 낮엔 노랗고 밤엔 금빛인데다 텐트처럼 부분부분 솟아오른 외관이 특징인데, 이 모습이 마치 서커스단의 천막과 같다고 해서 ‘카라얀의 서커스(Zirkus Karajani)’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에 오기 전 들른 모차르트 축제극장을 떠올리고 있자니 역시 ‘카라얀!’이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는 음악적으로도, 그 외적으로도 최고의 지휘자임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와 달리 필하모니는 극장 입구에서부터 티켓 확인을 한다. 즉, 공연 티켓을 갖고 있어야만 극장을 둘러볼 수 있다는 뜻이다. 공연 두 시간 전쯤 도착해 티켓 오피스에 확인해보니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 스탠딩도 없다며 단칼에 말을 끊는다. 극장 주변에 한국인이 꽤 보여(독일에 거주하는 음악 전공 한국인 유학생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붙잡고 물어봤지만 남는 티켓은 없고, 암표상에게 가보라는 얘기를 해줬다. 극장 정문으로 다시 나가 보니 암표상과 암표를 구하려는 사람이 가득한 게 아닌가. 신나게 극장에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남은 티켓은 60유로짜리 뿐, 저렴한 티켓은 이미 다 나갔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에 학생이라 돈이 없다고(!) 징징거렸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붙잡는 게 아닌가. 오랜 기다림 끝에 티켓을 손에 넣었고, 극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로비에서 층별 객석으로 통하는 일반적인 극장과 달리, 베를린 필하모니는 중앙 로비에서 사방팔방으로 출입구가 이어지는 특이한 공간이다. 그래서 이곳에 처음 방문한 관객이라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인데, 오각형 무대 모양에 맞게 다섯 개의 면에 객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 오각형 무대가 필하모니의 특징이기도 한데, 베를린 필의 로고도 오각형으로 되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200여 석의 객석이 마치 포도밭처럼 높낮이를 두고 설치되어 있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같은 극장 배치는 ‘빈야드 스타일’이라 부르는데, 특히 음향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덧, 현재 우리나라에 건설 중인 롯데 콘서트홀이 국내 최초 빈야드 스타일의 극장이다.)


로비에서 위쪽으로 가지처럼 뻗어나가는 여러 계단 중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안내원에게 물어 객석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언덕을 오르내리듯 객석이 펼쳐지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자리한 곳은 일반적인 극장에 비유하자면 합창석인데, 연주를 듣기에 무리가 없었고 덤으로 지휘자의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니 객석 배치도
B구역(정방향)에서 바라본 포디엄 (c) Berliner Philharmoniker
K구역(aka. 합창석)에서 바라본 포디엄. 연주자들이 본공연에 앞서 악기를 점검하고 있다.


이날 베를린 필의 연주는 칼 하인츠 스테픈스(Karl-Heinz Steffens)의 지휘로 펼쳐졌다. 이방인의 생각으로는 베를린 필의 수장인 사이먼 래틀 경의 지휘가 아닌데도 매진이라는 게 놀라웠다. 스테픈슨은 2007년까지 베를린 필에서 클라리넷 수석을 지냈으며, 최근 지휘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의 지휘자 데뷔는 새로운 지휘자의 탄생이라기보다는 베를린 필의 연주자 출신으로 지휘를 맡는다는 의미가 클 것이다.


연주된 프로그램은 베토벤과 독일 현대음악 작곡가 짐머만, 그리고 슈베르트. 그리 어려운 프로그램이나 거대한 구성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겁지 않고 흥미로운 곡들로 연주자들이 무대를 즐기는 모습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악기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연주는 오케스트라 전체에 생동감을 부여했고,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지휘에 따라 개개인의 연주자들이 하나되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짐머만의 곡은 독일 태생의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독일음악과는 다른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다소 즉흥적으로 느껴지는 구성과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다양한 음들이 베를린 필이기에 소화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스테픈슨은 마치 큰 프라이팬에 여러 가지 재료를 던져 넣으며 요리하는 듯한 지휘를 선보였고, 그의 손짓과 몸짓에 따라 박자와 악기가 어우러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3번이었다. 강약의 완급을 능숙하게 조절하며 마치 한 권의 동화책을 읽듯 책장을 한 장씩 넘겨갔다. 2악장은 놀이동산에 온 듯 즐거웠고, 3악장은 수많은 커플들이 춤추는 연회장처럼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렇게 호흡을 끊지 않고 4악장까지 시원스럽게 연주하며 달려 나갔다.


커튼콜 모습


무대를 중심으로 사방이 빼곡하게 객석으로 둘러싸여 있는 베를린 필하모니는 얼핏 보면 연주자들이 관객들의 기에 눌릴 것 같은 구조다. 그럼에도 오히려 연주자들은 이런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무대까지 관객에게 자리를 내주고도 이들의 연주에는 부담감이 없었다.


베를린 필은 극장이 쉬는 월요일을 제외하곤 매달 내 수십 번의 연주를 이어간다. 거장 사이먼 래틀 외에도 많은 지휘자들이 베를린 필을 찾으며,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객석은 연일 관객들로 가득 찬다. 게다가 '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을 통해 관객들은 고품질의 연주를 어디서든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됐고, 이 날 연주도 디지털 콘서트홀을 통해 생중계됐다. 대단한 프로그램도, 특별한 연주자가 협연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객석에 자리하는 베를린의 관객들이 있기에 ‘베를린의 자부심’이자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다.


*tip

한국에서도 베를린 필의 연주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베를린 필 디지털 콘서트홀과 함께라면! www.digitalconcertha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