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 장사익
“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해요. 나는 이 세상에서 광대처럼 노래하며 사는 게 임무인 것 같아. 실패하더라도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 해보고 가는 게 멋있는 인생이지.” 홀연히 세상에 나타난 도인 같은 그를 보고 우리는 가장 한국적인 대중가수이자 가장 대중적인 소리꾼이라 부른다. 내 길을 찾기 위해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고 마흔여섯 살에 데뷔한, 칠순을 앞둔 지금이 가장 즐겁다는 장사익은 우리네 삶을 어루만지기 위해 오늘도 희로애락을 노래한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가부좌를 튼 그가 인왕산 자락을 배경으로 차를 우린다. 잠시의 기다림 끝에 우러난 구수한 황차의 빛깔처럼 그를 둘러싼 풍경도 울긋불긋 물들었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곧 산을 넘어가려 자세를 잡고, 늦가을 찬바람에 마당에 걸린 풍경이 낭랑히 울린다. 시시각각 해의 위치가 바뀌자 너른 창 옆에 앉은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도 모양을 이리저리 바꾼다.
유독 바람이 세차던 11월의 어느 날,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세검정에 위치한 자택을 찾았다. 곳곳에 뿌리내린 나무의 아량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보며 언덕을 오르자 직접 써붙인 문패가 손님을 반겼다. “차를 너덧 번 나눠야 마음이 통한다”라며 그는 말 대신 찻잔을 먼저 건넸다.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_ 허영자 시인의 <감>
누군가는 그를 ‘가장 한국적인 대중가수’라 부른다. 대중음악의 계보에 자리한 여러 이름 중 그에게서 유독 느껴지는 짙은 한국적 정서 때문일 것이다. 무대에 설 때면 늘 하얀 두루마기를 챙겨 입는 것 역시 그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또 누군가는 그를 보고 ‘가장 대중적인 소리꾼’이라 일컫는다. 전통예술에 정통한 ‘소리꾼’이지만 언제나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가까운 위치에 서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어진 듯 이분법적인 두 수식어를 두고 그의 생각을 물었다.
“잘 아시겠지만, 소리꾼이라는 건 국악 명창에게 붙여주는 이름이지요. 그런데 전 대중음악 분야에 있단 말이죠. 국악도 아니고 대중음악을 하는 저를 소리꾼이라 부른다는 건… 명예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제대로 하라는 의미로 생각해요. 노래할 적마다 소리를 가다듬고 나름대로 ‘소리꾼’에 맞는 격을 갖추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 무언가를 규정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세상에 이름을 남긴 예술가 대부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 타인에 의해 이름을 갖게 됐잖아요. 사람들은 자꾸 규정하려고 하지만, 저는 절차가 없는 사람이라 쉽지 않을 거예요. (웃음)”
잘 알려져 있듯 그의 이력은 예술가라기에는 사뭇 독특하다. 10개가 넘는 직업을 전전하고, 우리 나이로 마흔여섯 살에 데뷔했다. 그는 꿈이라는 것이 반드시 어릴 적부터 목표로 두고 달려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하기까지 거쳐온 수많은 직업이 모두 자신의 길이 아니었을 뿐, 그는 넘어지고 깨지고 다시 일어서 이곳까지 왔다.
“이 나이까지 소리를 하는 건 어린 시절의 영향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께 발탁돼서 웅변대회에 나갔는데, 일단 웅변을 하려면 목이 트여야 한다는 거예요. 매일 뒷산에 올라가 30분씩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다 정치하는 사람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겠다는 꿈을 가졌죠.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로 이렇게 가수를 할 줄 알았을까요?”
장사익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1967년에 들어간 첫 직장은 공평동에 위치한 보험회사였다. 목청이 유독 좋았던 그는 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낙원상가 근처에 있는 작곡가 사무실로 좋아하는 노래를 배우러 다녔다. 하지만 군을 제대하고 돌아오자 멀쩡하던 회사도 쓰러졌다. 그 역시 생계를 위해 직업을 연거푸 바꿔야 했다. 그러나 고단한 삶의 순간에도 놓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국악이었다.
“그렇게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국악은 꾸준히 했어요. 악기를 배웠죠. 직장을 옮겨 다니면서 몸과 마음이 힘드니까 그걸 이기자는 마음으로 음악을 한 거예요. 태평소, 피리, 단소, 대금 등 10여 년 동안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그러다 직장이 엉망진창이 되면서 다 때려치우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 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꿈을 찾은 게 태평소였어요. 이 악기 하나만 잘해도 먹고살 걱정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딱 3년만 해보자고 마음먹었죠.”
그때부터 그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이광수, 김덕수와 어울리며 놀 판을 벌일 때면 세상 걱정이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뒤풀이에서 그가 가락을 뽑으면 모두가 감탄하며 넋을 놓고 보기 일쑤였다. 당시 그의 18번은 <동백아가씨>, <봄비>, <님은 먼 곳에> 같은 유행가였다. 그의 모습을 눈여겨본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형님, 한 번 놀아봅시다”라고 권해 홍대 앞 소극장 예에서 무대를 열었다. 100석 규모의 공연장에 이틀간 800여 명이 몰렸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 때의 일이다.
장사익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절차 없는 사람”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목적의식을 갖고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되는대로 살아온 인생이 지금의 자신이라는 것이다. 처음 시작은 대중가요였지만, 가장 힘든 시기에 국악을 접하면서 대중음악과 국악의 조화를 이뤄냈다. 그는 대중가요, 팝, 클래식 음악, 국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음악이 자신의 노래에 녹아 있다고 했다.
늦깎이로 데뷔해 20년 넘게 쉬지 않고 노래해온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16년, 성대에서 작은 혹이 발견돼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쓴 것을 먹고 나면 단것이 더 달게 느껴지듯이, 노래를 하지 못한 시간 역시 값지다고 회고한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아랫소리가 자꾸 닫히고 서걱거려서 병원에 다녀왔죠.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막막했어요. 노래하는 사람에겐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벌써 2년쯤 됐네요. 절망적이었지만 건강하게 오래 노래하라는 긍정적 신호로 생각했어요. 수술하고 딱 8개월 쉰 다음 복귀 콘서트 <꽃인 듯 눈물인 듯>을 열었죠. 지금 부르는 노래는 수술 전에 부르던 노래와 달라요. 쉬면서 내 노래가, 내 소리가 더욱 소중해졌어요. 앞으로 노래하면서 더욱 진실한 마음과 진정성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고난을 겪고 나면 행복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그러잖아요. 제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랄까, 그런 거예요.”
2년에 한 번꼴로 콘서트를 열어 전국을 도는 그가 올해 말 준비한 무대는 <자화상 七>이다. 칠순을 앞두고 드는 여러 생각과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바탕으로 이번 공연을 기획했다. 수십 번 거울을 보고 외모를 매만지지만 정작 거울 속 진정한 모습은 알 수 없는 자신을 성찰하며 곡을 썼다.
“공연명에 붙은 ‘칠’(七)은 내 나이 칠순을 뜻해요. 예순에는 세월을 잘 몰랐어요. 요샌 환갑이 예삿일이 됐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7이 되니까, 세상이 달라 보여요. 야구만 봐도 9회까지 진행되잖아요. 우리 삶이 구순까지 간다면 이제 경기는 2회밖에 남지 않은 거죠. 문득 앞만 보고 걸어온 나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봤어요. 단풍도, 노을도 지는 마당에는 아름답게 반짝 빛나는데 말이죠. <자화상>이라는 시를 읽으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공연은 11월 24일과 25일 양일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뻗어나간다. 대구(12월 2일), 부산(12월 8일), 광주(12월 15일), 대전(12월 26일), 고양(12월 29일) 등 각지에서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내년 2월엔 러시아 모스크바 공연도 앞두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그는 기존 노래와 새로 발매한 9집의 수록곡을 엮어 선보인다. 특히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새 노래를 통해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읊조린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_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장사익은 올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 무대에 올라 경기장과 TV, 인터넷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그간 수많은 곡을 불렀지만, 이날 예정된 음악은 다름 아닌 애국가였다.
“영광스러운 자리였어요. 제 평생에 있을까 말까 한 일이고요. 우리가 막대한 돈을 들여 올림픽을 개최하는 이유가 뭘까요. 한국, 그리고 우리의 문화를 알리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라면 젊은 스타가 턱시도 입고 나와서 근엄하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게 기회가 주어졌을까 생각했어요. 애국가라는 건 그 나라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것이니까요. 평소보다 서너 키 올리고 노래 길이를 두 배 정도 늘려서 천천히, 우렁차게 불렀어요. 늘 듣던 애국가와는 다르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렇다면 장사익이라는 예술가가 품고 있는 ‘한국적’ 속성은 어디에서 발현되는 것일까.
“꼭 국악만이 한국적인 건 아니죠. 제 노래가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예술, 그게 ‘한국적’인 게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김용택 시인의 시집 <섬진강>에 실린 <그랬다지요>라는 제목의 시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보기엔 간단한 시인데,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깨달음이 있죠. 내 삶이 이게 아닌데, 그런데도 세월은 흘러서 봄이 오고 봄이 가고… 그렇게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란 말이죠. 위아래, 좌우 구분 없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이런 생각과 느낌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 겪는 고민을 함께 위로하고 노래하는 것이 이 시대의 ‘한국적’ 의미겠죠.”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노래로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말을 자주 꺼냈다. 노래의 힘은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데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이렇게 많은데도 오래가는 가수가 적은 것은 노래의 진정한 의미가 결여됐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노래라는 건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계절 중에 가을만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추운 겨울이 있어 봄이 더 아름다운 거겠죠. 멋지고 화려해서 인생이 아니라, 애환이 있어 인생이에요. 대부분이 넘어지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위로하는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즐거움은 금방 잊히지만, 내면의 슬픔은 오래가니 말이죠.”
그래서인지 장사익의 노래에는 깊은 페이소스가 스며 있다. 부침이 많았던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라도 하듯이.
“1집 음반 <하늘 가는 길>은 40대 중반에 나왔어요. 그리고 차례로 50대, 60대… 이제 70대를 앞두고 있죠.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있잖아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에 빗대 그러한 느낌을 풀어내는 겁니다. 젊을 때 바라본 세상과 나이 들어서 본 세상은 확연히 달라요. 그때그때 내 나이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을 노래에 담고 싶어요. 다만 가사를 쓰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인의 말을 자주 빌려와요. 시 한 수에는 사람을 울리게 하는 힘이 있잖아요.”
4학년에 노래를 시작해 7학년을 앞둔 그는 숫자가 무색하게 여전히 정정하고 올곧은 소리를 자랑한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할 나이라지만, 우리는 칠순 이후 장사익의 소리가 궁금하다.
“늘 해온 대로 가는 거죠. 약간은 긴장한 채로 세상을 보면서. 이제 70대가 되지만, 70대 중반을 넘어서면 그때 보이는 세상이 또 있을 거란 말이에요. <찔레꽃>을 부를 때는 객기도 있고, 힘도 강했어요. 그 이후로 25년이 지났고, 이젠 사회적으로 꼰대에 해당하는 나이가 되어버렸죠. 앞으로는 나이 드는 모습을 노래하고 싶어요. 곧 죽음이라는 걸 생각할 때가 될 텐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노래하는 건 또 얼마나 재밌을까 싶어요. 목이 다 갈라지고, 노래가 흔들려도 아흔 살에도 무대에 설 수 있다면… 그때 부르는 노래가 진짜 노래가 아닐까 싶어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처럼, 그게 노래하는 사람들의 꿈인 것 같아요.”
인터뷰 도중 그가 호흡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한 수 뽑는다. 반주도, 지시표도 없이 그저 숨 쉬는 대로 음을 만들어낸다. 장사익만의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자, 오직 그이기에 가능한 노래.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 바로 예술”이라고 했다. 홀연히 세상에 나타난 도인처럼 그는 자신의 뜻이 닿는 대로 걸어간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해요. 나는 이 세상에서 광대처럼 노래하며 사는 게 임무인 것 같아. 실패하더라도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 해보고 가는 게 멋있는 인생이지.”
글 김태희 자유기고가
사진 손홍주
사진 제공 행복을 뿌리는 판
*서울문화재단 월간 [문화+서울] 2018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