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 <가무악칠채>
2018년 11월 22~24일 | 국립극장 달오름
한 편의 록 콘서트 같은 무대였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바닥에 드러누운 무용수들은 다시 칠채 장단이 연주되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춤을 이어갔다. 이성적으로 계산된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반응한 움직임이었다.
국립무용단 단원 이재화가 안무한 <가무악칠채>가 11월 22일부터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공연됐다. 이 작품은 올해 3월 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에서 발표한 단편을 1시간 길이의 중편 작품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넥스트 스텝>은 국립무용단이 기획한 안무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으로, 공모를 통해 단원 3명을 선정하고 작품 발표 기회를 제공했다. 이재화의 안무작은 초연 당시 호평과 함께 발전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국립무용단 레퍼토리로 선정돼 한층 발전시킨 형태로 선보일 기회를 얻었다.
그간 국립무용단은 전통을 기반으로 다양한 창작을 시도하면서 ‘한국적’에 대한 정의와 ‘한국무용’의 본질에 대해 증명해야 하는 과업을 안고 있었다. 현대무용 혹은 해외 안무가와 작업하는 동안 끊임없이 ‘이것이 왜 한국무용인가’라는 질문을 받아왔고, 그에 대한 답을 어떻게든 내어놓아야만 했다. 그 흐름 속에서 젊은 안무가 이재화의 <가무악칠채>는 그간 숱하게 들어온 질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의 주요 모티프는 ‘칠채 장단’이다. 홀수와 짝수 박이 엇갈려 형성하는 독특한 장단인 칠채를 토대로 안무의 기본 틀을 구상했다. 하나의 장단이 박자·리듬·연주 방식의 변화를 통해 얼마나 다채롭게 표현될 수 있는지 가무악, 즉 춤과 노래, 음악의 조화로 보여준다.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출연한 이재화는 장구·북을 연주하고, 직접 루프 스테이션(즉석에서 리듬을 녹음해 반복 효과를 만드는 음향기기)을 작동해 다층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붉은 조명이 밝혀진 무대 한쪽에 쌓인 박스 위에서 여성 무용수가 홀로 장단에 몸을 맡기고 있다. 새하얀 맨투맨 혹은 후드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은 무용수들이 하나둘 무대에 등장한다. 이들은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하지만, 몸은 이미 리듬을 타고 들썩이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젊음’을 표방한 무용수들은 마치 팝이나 록 음악을 즐기듯이 장단에 어울려 논다. 젊은 세대가 우리 전통을 향유하는 방법은 이런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이 풍경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드럼, 베이스, 기타 등 밴드 편성의 연주와 텐션을 자극하는 무용수들의 테크닉이다. 이들은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위치에서 몸을 던지거나 공중제비를 돌며 관객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만든다. 불안정한 형태의 오브제와 붉은색 조명, 이와 대비를 이루는 순백색 댄스 플로어와 의상이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강화한다.
<가무악칠채>에는 20~30대의,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국립무용단 단원들과 소리꾼 김준수(국립창극단 단원), 그리고 국악기와 밴드 연주자 7명이 출연한다. 가무악을 구성하는 출연자 15명 모두가 무대 위에 자신의 개성을 뚜렷하게 표출한다. 전통을 출 때, 무용수들은 자신의 색깔을 빼고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같은 동작이라 할지언정 자신의 방식대로, 온전히 자신의 호흡이 가는 대로 움직인다.
인상적인 장면은 소리꾼 김준수와 무용수 조용진의 듀엣. 안무의 과정을 생각하면 장단을 연주하고 이에 맞게 춤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무대에서는 내적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무용수를 관찰한 소리꾼이 움직임에 장단을 입힌다. 두 사람이 만드는 춤과 음악은 때때로 빨라지고 느려지며 말 그대로 ‘가무악 일체’를 보여준다.
전통과 컨템퍼러리를 양극단에 둔다면 <가무악칠채>는 그 척도 위에서 자유롭게 양쪽을 미끄러지며 오간다. 개방형 무대에 무빙 라이트로 화려한 조명을 구사한 전반부가 컨템퍼러리에 가깝다고 한다면, 무용수들이 붉은색 슈트로 갈아입고 등장하는 중반부는 비교적 전통의 색이 짙고, 후반부는 그사이를 오가며 균형추를 맞추는 식이다. 춤과 무대의 요소를 통해 한국무용이 이토록 다채로운 형태로 변형, 창작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늘날 안무가에게는 본래의 업무인 안무와 연출뿐 아니라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능력까지 요구된다. 이재화는 조명과 사운드뿐 아니라, 영상기술을 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돋보인 것은 레이저의 사용인데, 선 형태의 빛을 무대 위에 투사해 악기의 현으로 상징한 아이디어가 기발했다. 무대 중앙에 앉은 아쟁 연주자가 활을 켜기 시작하면, 무용수들은 바닥을 구르며 빛이 몸에 닿도록 만든다. 활로 아쟁 현을 두드릴 때면 플로어에 몸을 굴리고, 현을 뜯기 시작하면 섬세하게 손으로 빛을 짚어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서사가 없는 작품을 1시간 길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다양한 연출을 통해 해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뛰어난 테크닉, 무대의 산뜻한 미감, 적재적소에 삽입된 유머, 춤의 속도감은 마치 록 콘서트처럼 객석을 들썩이게 하는 감흥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다만 뛰어난 무용수 개개인의 춤을 온전히 감상할 장면이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군무만 아니라 카덴차 역할을 하는 독무 혹은 듀엣이 있다면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무악칠채>는 우리가 오늘날 한국 창작무용을 눈여겨봐야 할 필요성과 국립무용단의 다양한 행보를 지켜봐야 할 이유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스스로 무용수(手)에 그치지 않고 무용가(家)가 되기 위해 도약한 이재화의 행보를 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할 이유다. /글 김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