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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r 11. 2019

과거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다

국립무용단 <시간의 나이>

*2016년 3월 작성한 글입니다


‘협업’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어쩐지 걱정부터 앞서는 요즘, 실로 오랜만에 주목할 만한 ‘공동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영상과 춤이 어우러지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온 프랑스 안무가 조세 몽탈보와 국립무용단이 그 주인공이다. 2014년,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과 작업한 신작 <회오리>로 화제를 모았던 국립무용단의 두 번째 해외 안무가 프로젝트다. 특히 이번 국립극장과 샤요국립극장의 공동제작은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이번 만남의 성공 확률은 반반이다. 재기 발랄한 연출을 선보여온 조세 몽탈보가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국립무용단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그동안 한국과 교류한 해외 안무가들의 면면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뉘었다. 한국 무용수가 선보이는 움직임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견하거나, 동아시아의 작고 생소한 한국의 문화에 흥미를 느끼거나. 국립무용단이 테로 사리넨과 작업한 <회오리>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피나 바우슈의 <러프 컷>이나 조엘 부비에의 <왓 어바웃 러브>는 후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세 몽탈보는 이번 작품에서 그 경계를 가뿐하게 무너뜨릴 것 같다. “타악 연주와 함께 열정적으로 춤추는 무용수들의 춤사위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국은 전통의 뿌리를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변화와 도약에 대한 무한한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강조했던 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영상과 움직임, 그 접점을 찾는 안무가

프랑스의 다섯 개 국립극장 중 유일한 무용 전용 극장인 샤요국립극장의 상임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세 몽탈보는 유년시절부터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프랑스로 이주한 그는 건축가였던 아버지 아래에서 미술사와 조형예술을 전공했는데, 이때의 학습경험은 영상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시각적인 놀라움을 선보이는 지금의 작품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제롬 앤드류, 잔 바이트를 비롯한 표현주의 안무가와 프랑수아 드퓌, 도미니크 드퓌에게 무용을 배웠고, 파리현대무용단(BMP)에서 활동하며 전문적인 무용가의 길을 걷게 됐다. 메소드나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아닌, 다양한 스타일의 무용가에게 배운 그는 이후 카롤린 칼송, 루신다 차일드, 얼윈 니콜라이, 머스 커닝엄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대가들의 워크숍에 참여하며 폭넓은 춤 스타일을 체득했다.


안무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짧지만 강한 이미지의 유희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1986년 스위스 니옹 콩쿠르에서 수상하고 연이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칼리아리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으며 점차 대중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8년, 도미니크 에르비외와 함께 설립한 몽탈보 에르비외 컴퍼니는 한 단계 도약하는 기회가 되었고, 이후 비디오 아티스트 미셸 코스트와 작업하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았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샤요국립극장 공동극장장을 거쳐, 현재는 극장의 상임안무가로 활동하며 극장 안팎으로 다양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여러 작품 가운데 <르 자르댕 이오 이오 이토 이토(Le Jardin Io Io Ito Ito)>는 화려한 영상과 춤, 유희적인 의상과 무대가 어우러지는 몽탈보 에르비외 컴퍼니의 대표작으로, 올리비에 어워드에서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았다. 2004년에 연출가로 참여한 장 필리프 라모의 오페라 <레 팔라댕(Le Paladins)>에서는 그의 스타일이 오직 무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도 했다. <트로카데로의 돈키호테(Don Quichotte du Trocadéro)>, <아사 니시 마사(Asa Nisi Masa)>, <이 올레!(Y Olé!)>로 이어지는 그의 최근 작품들은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변화를 꾀하는 것이 엿보인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오늘의 몸짓

조세 몽탈보와 국립무용단의 첫 만남은 2013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한국에 방문한 샤요국립극장 관계자가 국립무용단에 관심을 보이며 연습실을 찾았고, 협업에 대한 물꼬를 텄다. 2014년 한국 국립극장과 프랑스 샤요국립극장의 공동제작이 결정되면서, 그해 11월 조세 몽탈보가 내한해 국립무용단과 만났다.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 북과 장구 등 타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태곳적부터 뛰어난 신체적, 음악적 테크닉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무용수 개개인의 개성도 무척 강했습니다. 연습을 계속 보고 있으니 이들의 움직임 자체가 시간적 순서가 무의미하고, 오히려 몇 세기에 걸쳐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기억을 토대로 오늘날의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은 야심이 생겼죠. 국립무용단의 무용수들은 열린 마음과 유연한 생각을 가진 이들입니다. 이번 작업은 결과와 상관없이 아주 멋진 예술적, 인간적 모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들이 함께한 <시간의 나이>의 핵심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다. 조세 몽탈보는 과거를 토대로 끊임없이 축적해가며 새로운 것을 완성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프랑스에서 바로크 무용을 배웠고, 이를 다양한 작품에 녹이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그는 “최근의 현대무용은 과거의 것은 모두 지우고 오직 새로운 것만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한국무용 고유의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작업을 이끌어낼 것이라 밝혔다. 플라멩코, 힙합, 아프리카춤 등 다양한 장르의 무용에서 고유한 특징을 끌어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그의 스타일이 한국무용과 만나 어떤 시너지를 발현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거를 담고 있는 전통적인 움직임을 살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의 움직임을 상상하는 것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콘셉트입니다. 이 작품에서 전통과 현대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개념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고, 섞이고, 공존함으로써 창작 작업에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의욕 덕분에 저는 남다른 애정과 상상력을 갖고 한국춤의 언어를 바꾸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억을 토대로 한 신체적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영감을 받고 있죠. 또한 익숙한 전통의 형태를 해체하고 새롭게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상상의 세계를 펼치고자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테크닉이 오늘날을 이야기하는, 완전히 현대적인 작품이 될 것입니다. 정리해 말하자면 ‘신체적 기억의 해체와 재건’인 셈이죠.


작품의 제목 <시간의 나이> 역시 이러한 의미를 담았습니다. 물론 명확하게 규정하기보다는 여러 의미를 담아 관객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었죠. 한편으로는 제 창작 작업에 큰 영감을 준, 2012년 타계한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는 작품을 발표해 온 그는 자신의 작업을 ‘시간의 나이’라는 명칭으로 분류하면서, 창작자들에게 과거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내다보라고 조언하곤 했습니다.”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이 타악 연주와 동시에 춤추는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는 그는 시간을 늘어뜨린 듯 매우 느리면서도 역동성이 공존하는 한국의 춤사위에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한국춤에는 많은 것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다이내믹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죠. 저는 이 춤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요소를 연구하고 추출하는 작업을 진행할 겁니다.”


안무 외에도 화려하고 황홀한 연출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영상과 그래픽을 활용해 무용과의 결합을 자주 시도해온 조세 몽탈보는 무용수와 관객의 무대 위 상호교감을 구현하고자 한다. “오늘날 디지털 영상은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공연예술을 위한 영상을 사용하고 싶었죠. 영상을 잘 활용하면 무대장치를 뛰어넘는 놀라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한국과 프랑스의 영상기술팀이 협력해 촬영한 크로마키 영상이 핵심적인 부분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특히 이번 작업에는 프랑스 사진작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장편 다큐멘터리 <휴먼>을 비롯한 그의 작품 중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영상을 일부 활용한다. ‘하늘에서 본 지구’ 프로젝트로 유명한 그는 지구와 자연의 변화를 기록해온 항공사진 전문가로, 최근 인간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의 나이>는 국립무용단의 두 번째 해외 안무가 프로젝트이자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한국 내 프랑스의 해’ 개막작으로 관객과 만난다. 해외 안무가의 이질적인 춤언어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로서 한국무용을 새롭게 바라보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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