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 <향연>
춤·색·음악으로 한국춤의 새로운 미학적 지평을 연 국립무용단의 <향연>이 돌아온다. 한자리에 모은 열두 편의 우리 춤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다.
단 이틀간의 공연에 객석은 뜨거운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국립무용단 <향연> 초연 무대가 펼쳐지던 날의 이야기다. 창단 이래 지금까지 국립무용단은 여러 작품을 통해 소품 형식의 우리 춤을 묶고 재조합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 연장선의 끝에 자리한 <향연>은 국립무용단의 기조를 이어나가면서도 동시대적으로 가장 신선한 감각을 덧댔다. 본질은 옛 것이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향연>은 그야말로 한국춤의 잔치다. 봄·여름·가을·겨울 우리나라의 뚜렷한 사계절을 고스란히 옮겨온 4막 구성 속에 궁중무용부터 전통무용·민속무용·종교무용을 비롯한 우리 춤의 역사와 변천사가 녹아있다. 종묘제례의 범절과 의미를 담은 경건한 움직임부터 재간을 한껏 부린 신명 나는 디딤새까지. 정구호 연출이 구상한 무대는 장식적인 화려함을 덜어내 단순함으로 채우고, 이것이 더욱 화려하게 증폭하도록 했다. 관객의 시선은 무용수의 의상과 춤사위에 실려 새로운 미적 체험으로 승화한다.
공연을 알리는 박이 울리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북의 두드림과 함께 막이 열린다. 이윽고 편종의 영롱한 울림에 두 줄로 선 24명의 남성무용수가 일제히 움직인다. 의복과 관, 갖신, 양손에 든 의물은 흑과 백, 오직 두 가지 색으로 꾸몄다. 왕의 문공을 찬양하기 위한 보태평지무의 하나인 전폐희문에 따라 구성한 이 ‘제의’는 전체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절제되고 공손한 인사다. 간격을 벌려 줄지어 추던 종묘제례 일무의 일부분을 구현했다. 두 손을 들었다 상체를 구부리며 예를 갖춘다. 마음이 절로 맑아지며 다음 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맑게 간드러진 여성 창사(唱詞)가 울려 퍼지면 같은 대열로 12명의 여성무용수가 자리한다. 모란꽃을 중앙에 두고 무동과 여령이 그 주변을 돌며 추던 춤 ‘가인전목단’을 토대로 구성한 ‘진연’이다. 모란꽃은 무용수의 손에 들렸고, 중앙에 내려온 붉은 매듭이 이들을 하나로 엮는다. 조선시대 역대 국왕 중 누구보다 춤을 사랑했고 궁중의식과 무용으로 왕실의 위엄을 자랑했던 효명세자의 뜻이 비치는 것 같다. 손끝에 들린 새하얀 모란꽃에서 시작해 동정을 따라 어깨를 지나 치맛자락까지, 화선지에 먹의 농담이 스민 듯 색이 물들었다.
궁중 연회의 마지막은 ‘무의’로 장식한다. 어둠이 가득한 무대에 한줄기 빛을 따라 나란히 자리한 여덟 무용수. 오와 열, 검의 각을 맞춰 간결하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무대 중앙에 띄워진 스크린 속 선이 맞닿는 순간, 다시 무대가 어두워진다.
하얀 도포 차림을 한 24명의 무용수 손에 들린 48개의 은빛 바라가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불교의식무용 ‘작법’의 하나인 바라춤이다. 한 쌍의 바라가 부딪히며 ‘차르르’ 소리가 흐른다. 깊은 산속 계곡물이 쏟아지듯 청량한 소리에 마음이 깨끗해지고 도량을 넓게 한다.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바라 소리를 작게 울리기도 하고, 바라를 치며 큰 걸음으로 움직이는 동작이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바라춤에 동반하는 호적·징·법고 장단을 제거하고 오직 징 하나만을 반주로 사용해 작품의 경건함을 더했다.
흰 저고리와 장삼을 걸치고, 붉은 가사를 대신해 자줏빛 치마를 두른 일곱 무용수가 법고 앞에 선다. 대표적인 전통 의식무 중 하나인 ‘승무’다. 군무로 편성된 이번 승무에선 고깔 아래 살짝살짝 비치는 고고하고 무욕적인 무용수의 표정은 없다. 펄럭이는 장삼은 흰 물결같이 흐르고 활달한 기상이 어깨를 따라 들썩인다. 북과장이 시작되면서 심장 가까이 울리는 북소리와 일제히 흩어지는 북채의 움직임을 따라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이내 정점에 다다르고 나면 잠깐의 여백이 마침표를 찍는다.
장구장단과 함께 진쇠장단이 두드러지며 새로운 춤사위가 펼쳐진다. 무대 중앙 스크린엔 이들의 춤사위에 맞춰 격자무늬가 움직인다. 한 명의 남성무용수를 중심으로 네 명의 여성무용수가 따르며 무대 구성이 다채롭게 변화한다. 꽹과리의 쇠장단이 점차 변화무쌍해지니 이에 맞춰 남성무용수가 화려한 발재간을 선보인다. ‘가장 소리가 잘 나는 쇠’라 하여 붙은 이름, 그 진수가 담긴 ‘진쇠춤’이라더니 그야말로 옹골찬 춤이 펼쳐진다. 경쾌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여름 기운이 한창이다.
거문고 장단에 맞춰 무대에 앉은 선비들이 부채를 펴 든다. 푸른 도포와 스크린 속에 흘러가는 구름장식, 먼 곳을 응시하는 무용수의 시선을 따라가니 마치 구름 위를 유유자적하는 듯하다.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나는 표정에 의연한 기품을 풍기는 한량무가 무르익을 즈음, 백색의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갓 위에는 작은 학 모양 장식이 얹어져 있다. 이들은 겅중겅중 한 발로 뛰는가 하면, 유유히 주변을 살피며 뒷짐을 지고 걷는다. 국립무용단의 대표 소품작인 동래학춤을 재구성한 것이다. 경계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두 작품이 청명한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
호젓한 남성무용수들의 놀음에 이어 여성무용수들의 경쾌한 장단이 울린다. 우리 춤의 흥과 멋을 장구에 실었다. 몸의 곡선이 드러나도록 허리춤에 휘감은 초록 치맛자락이 여성미를 더한다. 중앙에 선 무용수를 필두로 열두 명이 뒤따르며 다채로운 구성을 선보인다. 맺고, 풀고, 디디고… 장단의 시작과 끝을 알싸하게 살린 춤사위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장구춤의 백미는 무용수들의 구음과 장구장단이 고조되는 후반부다. 돌고 뛰는 와중에 악기의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며 흥을 고조시킨다.
쉴 틈 없이 몰아간 장단은 소고춤으로 이어진다. 농악에서 즐기던 소고놀이의 유쾌한 동작과 가락을 짜임새 있게 재구성했다. 앞서 통일된 움직임이 주는 신명을 경험했다면, 소고춤에선 개개인의 화려한 춤사위를 즐길 차례다. 활달한 움직임과 발재간, 소고를 치는 박력과 특유의 흥이 한데 어우러진다. 굿거리·자진모리·휘모리 등 다양한 가락이 연주되는 가운데 마치 대결이라도 하듯 무용수들이 개인기 열전을 펼친다. 연풍대·자반뛰기부터 애크러배틱까지, 양쪽에 줄지어 선 무용수들이 흥을 돋우면 한 명씩 나와 한바탕 놀음을 펼친다. “얼씨구”, “좋다”, “잘한다” 객석 곳곳에는 자연스레 추임새가 터져 나온다.
장구에서 소고를 거친 흥은 북에서 한껏 고조된다. 24명의 무용수가 일제히 선보이는 오고무 차례다. 치자를 물들인 듯 샛노란 빛깔의 의상과 모노톤으로 채색한 북이 대조를 이루며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2열 종대로 꾸려진 대열은 원형무대가 회전하면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각도를 펼쳐 보인다. 위아래 좌우를 번갈아 두드리며 하나의 소리로 모아진 북의 울림은 새 생명이 움트는 역동적인 기운을 닮았다. 무용수들은 허리를 제치거나 좌우로 돌려가며 북을 두드리고, 위로 뛰어올라 내리치거나 구음과 함께 북채를 마주치기도 한다. 일체된 움직임과 높낮이·강약의 변화를 거듭하는 가락 속에 완연하게 무르익은 가을의 풍경이 엿보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박이 울린다. 절도 있는 동작과 함께 박을 연주하는 서무가 끝나면 무대에는 7개의 노란 매듭이 드리운다. 청색 의상에 사모를 본뜬 관을 쓰고 손에 적삼을 든 남성들의 춤에 이어 매듭의 높낮이가 바뀌고, 족두리를 쓰고 적색 의상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여성무용수들은 적삼을 들지 않은 대신 겉옷 밖으로 폭이 좁은 흰 소매가 드러나는 상의를 입어 섬세한 손놀림이 더욱 돋보인다. 본래 태평무에는 오방색뿐 아니라 여러 가지 색이 의상에 사용되지만, 이번 ‘신태평무’에선 의상은 빨강과 파랑으로 단순화하고, 매듭은 노랑, 무대엔 흑과 백을 사용해 절제된 오방색을 완성했다. 색이 정리되니, 무대는 세련되고 춤은 풍성해졌다.
복잡한 장단을 경쾌하게 가로지르며 때로는 장중하고, 때로는 기교적인 놀림이 이어진다. 50여 명의 무용수가 한데 모여 왕실의 번영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면서 모든 춤이 마무리된다.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인사하니 지금의 안녕에 감사하고 다가올 새로운 봄의 춤을 기약한다.
* 국립극장 「미르」 2016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