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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r 04. 2016

한국에서 셰익스피어를 기억하는 어떤 방법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NT Live <햄릿>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서거한 지 400년이 되었다. 그의 탄생 450주년이었던 2014년부터 올해까지 전 세계가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영국과 비행기로 14시간이나 떨어진 동아시아의 한국에서도 연초부터 끊임없이 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의 작품은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사랑받는 것일까.


NT Live가 상영되고 있는 국립극장의 모습(사진제공=전강인/국립극장)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한국 국립극장에서 NT Live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NT Live'는 'National Theatre Live'의 줄임말로, 영국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화제의 연극을 촬영해 전 세계 공연장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도록 생중계 혹은 앙코르 상영하는 프로그램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MET; Live in HD'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과 같은 최근 대다수의 공연장에서 시도하고 있는 영상사업 중 하나이다. 2009년 시작한 'NT Live'는 영국 국립극장에 올려진 작품뿐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을 중계하는 등 작품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작품을 영상으로 본다니,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공연예술계에 영상화의 움직임이 처음 일어나던 당시 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일회성이나 현장성이 현저히 떨어질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객에게 상연된 영상은 공연 자체를 얼마나 잘 구현했는가, 보다도 고정된 객석에 앉아 반강제적 시야로 무대를 볼 때는 불가능했던 경험을 실현함으로써 공연예술계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영국과 한국의 관객이 만나는 순간(사진제공=전강인/국립극장)


영상으로 보는 공연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시선을 제공함으로써 관객에게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NT Live나 MET에서는 최소 4~5대, 많게는 10대가 넘는 카메라를 설치해 실황 무대를 촬영한다. 이렇게 담아낸 영상은 가장 흥미롭고, 스펙터클하며, 관객이 쉽게 놓칠 뻔했던 부분들을 쏙쏙 뽑아 편집한 또 한 편의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공연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을 구축할 수는 없지만, 전문적인 디렉션 하에 연출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장면들을 집중해서 볼 수 있다. 특히 무대 아래쪽이나 천장 꼭대기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앵글은 마치 전지전능한 공연의 연출가가 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 우리는 영상 덕분에 이곳 한국에서 큰 공을 들이지 않고 전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따끈따끈한 연출과 트렌드를 만나볼 수 있다. 영국에 가지 않았더라면 스크린이 아닌 연극 무대에 선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티켓 가격 1만 5천 원으로 매우 저렴하기까지 하다는 사실.


레어티즈와 햄릿(사진제공=Johan Persson)


몇 년간 꾸준히 NT Live를 선보여온 국립극장이 이번에 올린 작품은 바비컨 센터의 '햄릿'과 돈마 웨어하우스의 '코리올라누스'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한 편과 정치적 암투로 인해 몰락하는 장군을 다룬 또 다른 수작 한 편이다.


린지 터너가 연출하고, 2015년 8월 런던에서 초연된 이번 NT Live '햄릿'은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오직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을 맡았다는 것만으로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다. 영국 BBC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이자 배우 본연의 개성과 연기력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그다. 나 역시 '셜록' 시리즈의 팬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컴버배치가 셜록 홈즈가 아닌 햄릿을 잘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1회의 인터미션을 포함해 3시간 20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중간에 자리를 떠나는 관객 역시 많지 않았다. 실제로 관람해보니 스크린이라는 장벽을 넘어 바비컨 센터에 있는 기분이 들거나, 연기나 연출에 기립박수를 보낼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흡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극장을 떠날 수 있었다. 영국이 아닌 한국에서,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위대함을 기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NT Live 실제 상영 모습(사진제공=전강인/국립극장)


사실 이번 NT Live '햄릿'은 연극을 촬영한 영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몇 개의 정해진 카메라를 통해 화면이 줌 인-아웃되는가 하면, 배우의 대사가 끊기는 타이밍에 정확하게 화면이 전환되는 등 영화적 기법이 많이 적용됐다. 그래서 간접적이나마 연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잘 짜인 큐시트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상화한 공연을 처음 본 관객이라면 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로로 널찍한 무대, 드라마틱한 무대 세트나 화려한 연출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현대적인 부분을 한껏 살린 세련된 연출이 돋보였다. 린지 터너 연출은 새로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텍스트에 가장 충실한 무대를 완성했다. 1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셰익스피어 텍스트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독백이 다소 늘어지는 감은 있었지만 연극 초심자 또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많은 기대를 받았던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햄릿은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원작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답답할 정도로 고민을 거듭하는―햄릿 왕자의 주요한 인물적 특징은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컴버배치가 연기한 햄릿은 복수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디테일을 살리기보다는 그 일념 하나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극 전반의 데시벨이 고르게 조절되지 않고 매우 높은 상태로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연기의 호흡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장면까지 집중력 있게 끌어가는 힘은 단연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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