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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Aug 21. 2016

우리 클래식 발레의 현주소를 묻다

유니버설발레단 ‘지젤’과 국립발레단 ‘돈키호테’

빠른 속도로 성장해온 우리 발레계는 더 높이 오르기 위한 또 다른 과제 앞에 직면해 있다.


지난 6월 말, 국내의 양대 발레단이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을 차례로 무대에 올렸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6월 13~17일)과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6월 26~29일). 이 두 공연은 많은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공연이 새로운 작품이 아닌 클래식 발레였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최신의 작품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클래식 발레 작품은 단순히 어떤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 부여의 기능을 넘어 한 단체의 위상과 실력을 대변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작품 자체에서 고전(Classic)이 갖는 불변의 가치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문제의 원인은 작품의 핵심인 ‘안무’에 있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 (사진제공=유니버설발레단)


누구의 버전도 아닌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 


‘지젤’은 아돌프 아당의 음악에 장 코라이와 쥘 페로가 안무한 작품으로 1841년 초연됐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여러 버전은 마리우스 프티파가 개정한 버전에 기초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이 이 작품을 한국 무대에 가져온 것은 1985년으로, 이후 1999년 유럽 투어를 앞두고 마린스키 발레의 예술감독이던 올레크 비노그라도프가 무대 디자인을 맡아 한 차례 개정을 거쳤다. 당시에 수정한 프티파 버전의 안무로 지금까지 공연하고 있다. 


지난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은 작품 전반의 구성과 안무에 있어서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지젤’은 1막 중반의 패전트 파드되를 보면 어떤 버전을 공연하는지 구별할 수 있다. 작품의 전반적인 구성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이 파드되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투영되는 것이다. 


프티파 버전의 초연이 이루어졌던 마린스키 발레에서는 앙트레-안단테-세 개의 솔로-코다로 구성된 파드되가 등장한다. 반면 로열 발레에서 올리는 피터 라이트 버전(1961)은 파드되(2인무)를 파 드 시스(6인무)의 형태로 재안무했다. 파트리스 바르 버전(1991)의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는 남녀의 파드되와 6명의 앙상블이 함께 추는 형태로 구성된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초기에 프티파 버전에 따라 이 장면을 파드되로 공연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 파 드 시스로 안무를 수정했다. 


안무가의 이름을 딴 각각의 버전은 공연이 올라가기에 앞서 대부분 노테이션(안무 기록) 혹은 영상물을 바탕으로 발레 마스터(미스트리스)와 함께 작품을 검토하는 단계를 거친다. 특히 안무에 있어 의도한 것들이 정확하게 구현되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티파 버전을 공연하는 다수의 발레단은 150년 전 안무가가 남긴 노테이션이 기록의 전부인 데다 이를 보존하고 있는 단체도 드물기 때문에 공연할 때마다 작품을 검토하는 것이 어렵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예술감독 유병헌이 발레 마스터의 역할을 대부분 수행한다. 문제는 공연을 올릴 때마다 세세한 수정과 여러 버전을 망라하는 개조를 가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은 그 누구의 버전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일말의 고민 없이 좋은 것은 가져다 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떼어버리는 일들은 특히 클래식 발레 작품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더 나은 공연을 위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수술을 거친 작품에 고전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을까. 2015년 6월, 유니버설발레단은 프티파 버전이 아닌 그램 머피 버전의 ‘지젤’을 새롭게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 (사진제공=국립발레단)


의문만 남은 국립발레단의 ‘돈키호테’ 


프티파의 안무로 1869년 세상에 등장한 ‘돈키호테’는 당대를 풍미한 안무가와 무용수 대부분이 재안무를 시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1900년 알렉산드르 고르스키는 프티파의 안무에 활기를 불어넣어 더욱 화려하고 다채롭게 구성했는데, 이 버전은 오늘날 모든 ‘돈키호테’의 토대가 되고 있다. 


루돌프 누레예프가 재안무한 버전은 그가 예술감독으로 있던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공연되는데, 주특기였던 발동작과 남성 무용수의 테크닉을 강조해 화려하고 흥이 넘친다. 그에 버금가는 남성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재안무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버전은 작품 곳곳에 삽입된 재치 있는 리액션과 애드리브가 특징이다. 지난해 로열 발레의 수석 무용수 카를로스 아코스타 역시 ‘돈키호테’의 재안무에 도전했는데, 이 버전에는 그의 고향 쿠바의 느낌이 가미됐다. 무용수들은 춤추는 가운데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탁자 위에 올라가 대결을 펼치는 등 다양한 안무로 작품의 틈새를 꼼꼼하게 메웠다. 


이 기세를 몰아 국립발레단에서도 새로운 ‘돈키호테’가 탄생했다. 문병남이 재안무한 버전은 국립발레단이 지난해 해설 발레로 쇼케이스를 거쳐 올해 6월 26일 첫 공연을 가졌다. 새로운 ‘돈키호테’의 첫인상은 썩 훌륭하진 않다. 안무가 ‘신선하다’ 거나 ‘새롭다’는 느낌보다는 이미 세계 각지에서 공연 중인 다양한 버전의 주요 동작들이 엿보였다. 특히 1막의 군무는 누레예프 버전과 기본동작 자체가 거의 흡사했고, 무용수들이 “예에~”하고 어설프게 외치는 장면에선 지난해 발표한 아코스타 버전에서 무용수들이 “올레!”하고 외치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2막 3장에는 지나치게 화려함을 강조한 나머지 너무 많은 디베르티스망(화려한 볼거리가 강조되는 몇 개의 춤)이 삽입되어 정작 결혼식 파드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국립발레단에서 공연한 고르스키 버전보다 많은 동작이 들어가 다채롭기는 하나 정리가 되질 않았다. 길을 떠나는 돈키호테를 향해 손을 흔들던 엔딩 장면에서 현시대에 필요한 도전 정신을 생각해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는 안무가의 변으로만 남았다. 


1991년 초연 이래 꾸준히 공연해온 고르스키 버전을 두고 굳이 새로운 버전을 제작한 것은 국립발레단만의 버전을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데다 안무가의 역량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굳이 새로운 버전을 발표한 것은 전시 행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 무대에서 “한국의 국립발레단은 문병남 버전의 ‘돈키호테’를 공연한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해본다. 


최근 들어 한국 발레는 질적·양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의 수도 월등하게 늘었다. 하지만 티켓이 얼마나 팔렸고 그날 객석이 매진을 기록했는지와 작품의 퀄리티는 별개의 문제다. 최근 단체들이 주목하는 무용의 대중화도 좋지만, 관객층이 두터워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작품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안무의 내실을 다져야 세계적 수준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좋지만, 그와 동시에 클래식 발레 작품들을 어떻게 유지하고 가꿔나가는지가 중요한 과제다. 러시아의 마린스키와 볼쇼이를 비롯한 해외 유수의 발레단들은 오래도록 사랑받는 클래식 발레를 토대로 명성을 쌓아왔다. 지금이야말로 클래식 발레의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시기다. 


* 월간 객석 2014년 8월호 CRITICAL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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