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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Aug 28. 2016

러시아 문화의 꽃, 발레

어린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발레부터 가르치는 나라, 문화 정책을 위해 무용수를 정치인으로 등용하는 나라, 발레를 보러 가는 것이 일상이자 삶의 즐거움인 나라. 어쩌면 ‘발레’는 러시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닐까.


<보석> 중 다이아몬드 솔로,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 (c) Gene Schiavone


발레의 시작은 ‘러시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레’하면 자연스럽게 러시아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발레는 러시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발레의 시초를 찾기 위해 14세기부터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운동인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자. 르네상스 동안 이탈리아와 프랑스 왕실에서는 그들의 품위와 자태를 지키기 위한 궁정무용이 발달하게 되는데,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장대하고 화려한 스펙터클을 구성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사치스러웠던 이탈리아에서 복합적 공연물인 ‘오페라’를 탄생시키게 되고, 프랑스 왕실로 넘어오면서 무용의 비중을 높인 ‘발레’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에 퍼져있던 현란하며 활기 있는 바로크 미학은 발레가 추구하는 경향과 딱 맞아떨어졌고, 발레를 좋아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국왕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러시아에는 언제 발레가 들어오게 되었을까? 르네상스 이후 서유럽에서는 예술로서의 발레가 아닌 단지 스타무용수의 성공에만 주목하게 되면서 발레리나를 중심으로 하는 낭만주의 발레가 흥행하게 된다. 하지만 서유럽의 낭만발레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당시 문화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제정 러시아에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황실에 궁정무용을 소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발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마린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c) mariinsky-theatre.com


고전 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

러시아 또한 이전의 유럽처럼 왕실의 후원 속에서 발레가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특히 안나 여제는 초기부터 발레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러시아 발레의 정착과 발전에 힘썼다. 왕실의 든든한 후원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러시아 발레를 세계의 중심에 올려놓은 것은 ‘고전 발레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 출신의 발레교사 마리우스 프티파라 할 수 있다. 그는 훌륭한 교육자일 뿐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50여 년 동안 60여 편의 작품을 남길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프티파가 러시아에서 구축한 고전주의 발레는 발레 양식의 기본을 완성하는 동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전형적인 발레 작품이 모두 고전주의 발레라고 생각하면 쉽다. 고전발레란 모던발레에서 보이는 자유로움과는 달리 형식적인 규칙을 갖고 있으며 감정적인 표현보다는 테크닉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한다. 또한 눈에 보이는 조화로움이나 질서, 대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들이 한 줄로 질서 정연하게 등장하고, 양쪽 대칭으로 군무의 모양을 만들며, 팔의 모양을 똑같이 유지하는 것 모두 프티파의 고전발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리우스 프티파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해적> 등 지금까지 공연되는 수많은 전막 발레를 탄생시켰다.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의 대표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발레곡에 전 4막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프티파의 전형적인 안무 스타일이 담겨 있다. 특히 이 작품의 주인공은 수많은 발레리나들이 꿈꾸는 역할로, 백조(오데트)와 흑조(오딜) 역을 한 명의 무용수가 맡아 주역 무용수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마린스키 발레 <해적> (c) Natalia Razina


더 화려하고, 더 눈부시게

프랑스 초기의 발레는 단순히 공연을 보는 것뿐 아니라 귀족들이 여흥의 일환으로 직접 춤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발레는 이미 서유럽의 높은 수준을 가져온 것이라 단지 관람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상류층들은 화려하고 눈부신 볼거리를 원했다. 이런 요구에 따라 러시아의 발레는 상당히 수준 높은 테크닉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난도의 테크닉은 특히 남녀 주인공의 2인무인 ‘그랑 파드되’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랑 파드되는 아다지오(Grand Adagio)-남녀 솔로 바리에이션(Solo Variation)-코다(Coda)로 구성된다. 특히 남녀의 솔로 바리에이션에서는 발레리노의 높은 점프와 발레리나의 토슈즈 테크닉을 주요하게 선보이며, 코다에서는 무대를 크게 사용하는 동작들로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특히 발레 공연에서 가장 박수를 많이 받는 발레리나의 32회전의 연속 푸에테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또 다른 고전발레의 특징인 ‘디베르티스망’은 내용과 상관없이 작품 내에 삽입되어 무용수의 기교와 용모를 보여주는 짧은 춤들로, 프티파가 전막 발레 속에 여러 나라의 민속춤을 삽입해 작품을 화려하게 구성하면서 탄생한 것이디. 이렇듯 고전발레에는 점점 더 어려운 테크닉과 화려한 춤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훗날 러시아의 발레 스타일 대표하게 되었다.


볼쇼이 발레 <돈키호테> (c) Damir Yusupov/Bolshoi Theatre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다

프티파의 고전발레 이후 발레 부흥을 맞은 러시아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방문하게 되면서 굉장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렇게 러시아의 발레는 귀족부터 서민층까지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어 19세기 말에는 ‘발레광’이라는 열렬한 관객층이 형성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발레광’이라는 뜻의 ‘balletomane’이라는 단어는 지금까지도 발레팬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관객들은 티켓을 구하기 위해 극장 앞에 줄을 길게 섰고, 돈 많은 귀족들은 박스석을 통째로 구입해 자녀 세대에까지 물려주는 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이 발레 보는 것을 일상생활의 일부로 즐기고 있으며, 생활이 어렵더라도 돈을 모아 발레를 보러 갈 만큼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발레가 화려하고 풍성하게 발전한 나라이니만큼 러시아 내에는 수많은 발레단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발레단이 바로 볼쇼이와 마린스키이다. 볼쇼이 발레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마린스키 발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두 발레단의 공통점이 있다면 외국인 무용수에 대해 굉장히 폐쇄적이고, 각각의 발레학교를 통해 잘 키워진 학생들을 무용수로 선발한다는 점이다. 사실 발레학교는 러시아 발레의 발전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볼쇼이 발레학교와 바가노바 발레학교는 국내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선호할 만큼 유명하고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국내 무용수 중에서는 김주원이 볼쇼이 발레학교를, 김지영이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졸업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졸업한 많은 학생들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 내에서 발레의 위상이 높다 보니 무용수가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신이 내린 몸매’로 유명한 볼쇼이 발레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러시아 대통령의 자문위원(문화위원회)이자 러시아 연방국가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의 문화 발전을 위해 무용수인 그녀를 정치권에 등용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마린스키 발레단에는 한국인 무용수가 있다. 외국인 무용수가 단 세 명 밖에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이곳에 당당히 입성한, 마린스키 발레 최초의 동양인 발레리노 김기민이다. 2011년 만 19세의 나이로 입단했고, 직위가 정해지기도 전에 주역으로 무대에 섰으며 현재 프린시펄(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발레팬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어릴 때부터 실력으로 인정받은 수재다.


어린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발레부터 가르치는 나라, 문화 정책을 위해 무용수를 정치인으로 등용하는 나라, 발레를 보러 가는 것이 일상이자 삶의 즐거움인 나라. 어쩌면 ‘발레’는 러시아를 움직이는 또 다른 힘이 아닐까.


글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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