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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Sep 10. 2016

전통과 컨템퍼러리가 만나면

김보람의 안무노트

국립창극단 신작 <오르페오전> 연습실에 등장한 안무가 김보람의 행적을 쫓았다.


안무가 김보람 (c) 전강인/국립극장


국립창극단 신작 <오르페오전>의 제작진 명단을 보던 중 고개를 갸웃했다. ‘안무 김보람’이라니…. 베일에 싸인 듯 아직까지 신비롭게만 느껴지는 신작의 이미지 위로 독특한 헤어스타일에 선글라스를 쓴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선입견이 생기려는 걸 막았다. ‘오페라의 창극화’라는 전대미문의 도전에 더해질 그의 움직임이 궁금해졌다. 현대무용은 물론, 발레·한국무용·클럽댄스 등 각종 춤 스타일을 망라해 ‘김보람식’으로 정리하는 그다. 


본격적으로 <오르페오전> 연습에 돌입한 국립창극단 연습실엔 거대한 경사무대 세트가 설치돼 있었다. 이번 공연에선 해오름극장의 광활한 무대 위에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방패연 무대가 구현될 예정이다. 공연을 두 달가량 앞둔 지금, 배우와 무용수들은 꽤 비탈진 경사무대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다. 


8월 11일 오전 11시, 일단 연습실을 찾았다. 안무가 김보람과 세 명의 무용수가 한창 작품을 위한 움직임을 구상하고 있었다. 삼각형 구도로 선 무용수들의 발 움직임을 따라 댄스플로어 위에 컴퍼스로 그린 듯한 동그란 원이 그려져 나갔다. 8박자를 토대로 기본적인 움직임(A)을 만들고, 이를 변화·확장시켜 A-A′-B-A″-C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움직임을 완성했다. 이를 론도 형식으로 진행하거나 속도를 변화해가며 반복했고, 보다 매끄럽고 완전하게 이어나갈 수 있도록 수정을 가했다.


말없이 동작을 구현하고 있는 무용수들을 바라보고 있던 김보람이 입을 뗐다. 그의 멘트 하나, 움직임 하나가 마치 섬세하고 치밀하게 연구하는 과학자를 보는 듯했다. 그에게 씌워진 ‘현대무용가’라는 일종의 직함, 그간 무대 위에서 선보인 작업들을 보며 떠올렸던 ‘힙(hip)’하고 ‘자유로운’ 인상은, 적어도 이 연습실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노테이션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편에 가까웠다. 이날 연습한 다섯 프레이즈의 움직임은 그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에서 선보인 <Mistake>(2013) 중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에 맞춰 춤추는 파트와 구조적으로 흡사한 진행을 보였다. 정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피아노와 첼로 선율 위로 자신만의 박자를 덧입혀 ‘움직임의 재미’를 보여줬던 <Mistake>의 안무와 지금 연습실에서 펼쳐지는 리서치의 과정 자체가 모두 ‘김보람 메소드’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안무 작업은 대략적인 전체 구성과 음악 선곡이 완료된 후에 시작된다. 먼저 음악의 선이 그려져야 무용이 이를 채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작의 특성상 선행 작업이 완료되지 않았기에, 그는 이후에 조합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오페라가 형식 자체에 발레 장면을 동반하는 것처럼 <오르페오전>에도 무용이 주요한 부분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13명의 전문 무용수가 출연하고, 창극단 배우들도 김보람의 안무를 습득해 작품에 녹일 예정이다. 김보람은 “창극과 오페라 모두에 어울리는 안무의 역할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라고 했다. 또한 글루크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정령들의 춤’처럼 작곡가 황호준은 이번 작품에 무용만을 위한 새로운 곡을 창작할 예정이다.


다음날 오후 1시. 점심식사를 마친 단원들이 삼삼오오 국립창극단 연습실에 모였다. 오늘 단원들과 연습할 파트는 사후세계 장면. 갖신·운동화·재즈화·무용연습용 슈즈·양말·맨발까지, 발만 봐도 창극단원 개개인의 개성이 전해진다. 동작을 어렵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웬걸, 생전 처음 해보는 동작에 연습실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무용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어떤 움직임을 지도할 것인지, 김보람에게 물었다.


“‘춤’이란 인식하기에 따라 춤이 될 수도, 춤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춤을 추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죠. 창극단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걷고 있는 것 하나까지 ‘춤’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죠.”


안무가 김보람이 이끄는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는 올해 초부터 전통과 어우러지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국립창극단 <오르페오전>도 그 연장선상의 작업이다. 어쩐지 컨템퍼러리 댄스와 창극의 만남은 재즈와 민요의 조합보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장 ‘동시대적인’ 창극과 무용이 만났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원래 국악과 창을 매우 좋아하는데, 전통을 하는 여러 예술가와 만나면서 더욱더 좋아하게 됐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이번 <오르페오전>까지 이어진 것 같네요. 전통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것이고,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니 무엇보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안에서 무용이라는 존재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창극이라는 ‘전통’ 안에서 가장 ‘현대’적인 움직임은 어떤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을지 <오르페오전>을 통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립창극단 <오르페오전>

날짜    9. 23(금)~28(수)
장소    해오름극장
관람료  VIP석 7만 원, R석 5만 원, S석 3만 원, A석 2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 국립극장 「미르」 2016년 9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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