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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Jun 26. 2016

춤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피핑 톰 <아 루에>

* 글을 읽기 전에...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 무용분야 가작에 선정된 평론입니다. 그간 당선작을 게재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극장과 나’가 2016년 2월호를 기해 잠정적으로 발간이 중단되고, 올해 들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운영 주체가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에 가능하다면 글을 읽어보고 싶다고 연락을 주신 분들이 있었고, 저 역시 인터넷에 공개된 수상작을 보며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부족한 글임에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작품 혹은 글에 관한 의견 주시면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있겠습니다!


2015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 무용분야 가작

[공연평] 춤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 피핑 톰 <아 루에>


또 한 편의 벨기에 현대무용이 서울을 강타했다. 지난 2015년 10월 2일과 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제15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개막을 장식한 피핑 톰(Peeping Tom)의 <아 루에(À Louer)>(2011)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1세기 들어 컨템퍼러리 댄스의 주류를 이끌고 있는 벨기에 무용단체를 만나는 것은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올해 초 로사스 무용단(Rosas)이 내한해 대표작 <로사스 댄스 로사스(Rosas danst Rosas)>를 비롯한 두 편의 작품을 선보였고, 2014년 니드컴퍼니(Needcompany)의 <머쉬룸(MUSH-ROOM)>, 2013년 울티마 베즈(Ultima Vez)의 <왓더바디 더즈낫 리멤버(What the Body Does Not Remember)>, 2010년 미셸 누아레 컴퍼니(Compagnie Michele Noiret)의 <드망-내일은...(DEMAIN)>을 비롯해 벨기에를 기반으로 한 여러 무용단체가 꾸준히 한국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피핑 톰의 공연은 최신 컨템퍼리리 댄스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출생지는 같지만 1980년대에 설립한 상기 무용단과 밀레니엄 선포와 동시에 태어나 올해로 열다섯 살 맞은 피핑 톰은 작품의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2000년을 기준으로 이전 세대가 프랑스 발(發) 누벨 당스(Nouvelle Danse)를 계승해 몸의 원초적인 움직임과 타 장르의 연출적 요소를 강조했다면, 후세대는 ‘무용(Dance)’이라는 개념이 ‘공연예술(Performing Arts)’로 옮겨가는 장르 붕괴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실상 피핑 톰의 <아 루에>를 무용작품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장르의 틀 안에 가두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무용’이라는 장르예술의 벽을 완전히 깨고 나온 이 작품은 ‘움직임’을 해체해 ‘공연예술’로 재탄생시키는 가운데 미학적 감각을 여실히 발휘했다.


작품을 논하기 전에 피핑 톰의 출생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독일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을 가지며, 자국어의 부재로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문화적 성향으로 인해 전통을 보존하기보다 타국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는 전통의 부재라는 약점이 될 수 있으나 벨기에의 경우 춤의 강호인 프랑스와 연극의 강호인 독일 양국의 예술을 선별적으로 수용해 자신만의 새로운 예술로 재탄생시켰다. 간섭하지 않고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벨기에의 예술지원 정책은 ‘벨기에 무용’의 부흥에 힘을 더했다. 정치적·사회적 환경 가운데 이들의 새로운 예술에는 자연스럽게 동시대적인 이슈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다양한 국적과 장르의 예술가와 교류하면서 다채로운 형태·주제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세계 무용계의 중심에 ‘벨기에 무용’이 화두로 등장하게 됐으며, 이들의 행보는 무용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벨기에 무용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장해 유럽을 휩쓴 누벨 당스와 독일 표현주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가 깊게 반영되어 있다. 무용을 시각예술의 관점에서 인지하고, 무용 대본이 아닌 문학, 영화, 미술 등에서 영감을 얻는 누벨 당스의 특징은 벨기에 무용에 있어서 ‘영화적 기법’의 사용이라는 영향을 미쳤다. 무용에 극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탄츠테아터의 특성은 움직임 위주로 진행되어온 당시의 무용작품에 플롯을 강조하게 하고, 예술작품이 현실을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현재,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의 뒤를 이어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안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 얀 파브르(Jan Fabre), 알랭 플라텔(Alain Platel), 빔 반데키부스(Wim Vandekeybus) 등 안무가들이 벨기에 무용의 1세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 니드컴퍼니에서 활동한 이력의 가브리엘라 카리조(Gabriela Carrizo)와 모리스 베자르 20세기 발레단의 단원이었던 프랑크 샤흐티에(Frank Chartier)가 함께 창립한 무용단 ‘피핑 톰’이 벨기에 무용의 새로운 대표 주자로 주목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쎄 드 라 베 무용단(Les Ballets C. de la B.)에서 만난 두 사람은 동등하게 ‘안무가’의 지위를 갖고 피핑 톰의 작품에 공동안무로 참여하고 있다. 한 사람이 주도권을 갖고 안무와 연출을 총괄하는 일반적인 무용단의 운영 방식과 사뭇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이들의 작품은 ‘가족’과 ‘인간의 조건’이라는 우리 삶에 밀접하게 관련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세 명의 아이를 함께 양육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삶에서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특히, 2013년 내한한 작품 <반덴브란덴가 32번지(32 rue Vandenbranden)>에서는 허름한 트레일러에 거주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뤘고, 최근에는 <아버지(Vader)>, <어머니(Moeder)>, <아이들(Kinderen)>로 구성된 3부작 시리즈를 안무해 공연을 앞두고 있다.


프랑스어 발음 그대로 ‘아 루에(À Louer)’라 번역된 이번 작품은 ‘임대하다’ ‘세를 놓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부동산에 내놓은 극장 건물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임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메인 카피로 등장한 ‘모든 것은 빌린 것’이라는 문장은 분에 넘치는 소유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일까, 혹은 몇 년 전 우리 사회에 열풍처럼 불었던 무소유론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보다도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까지 내 것인 줄만 알았던 자신의 삶과 역할, 인생 그 자체를 돌아보자는 것일 테다. <아 루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파산한 어느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파산’과 ‘빅토리아 시대’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배경이 될 뿐,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내 주변의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 ‘빌린 것’이라면 지금부터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일반적인 가정(假定)과는 조금 다른 전제 하에 작품이 펼쳐진다.


<아 루에>는 무용, 음악, 연극 등 여러 극적 요소가 결합된, 형식 자체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7명의 배우와 8명의 엑스트라뿐이다. 7명의 배우는 또다시 4명의 무용수와 2명의 성악가, 1명의 배우로 분리해볼 수 있다. 그들 중에는 성악가도 있고, 예술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경력의 소유자도 있다. 그러나 그 일원은 무용을 전공했든, 음악을 전공했든 상관없이 피핑 톰의 단원이다. 피핑 톰이 다른 무용단이 가질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단원 전체가 11명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피핑 톰’이라는 단체와 작품을 대표하며, 작품 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의기투합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은 현대예술이 단지 하나의 장르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타 장르와 결합했을 때 상대적으로 약세라고 여겨졌던 무용이 장르의 벽을 허문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예술임을 증명해 보였다.


막이 열리면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은 오래된 저택이기도, 불에 타버린 극장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악기 튜닝음이 음악처럼 흘러나오고, 몇십 년 동안 세탁하지 않았다는 커튼을 걷으니 저택의 공간으로 보이는 이곳은 극장의 무대 뒤편이기도 하다. 주인이 오랫동안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가구에는 하얀 천이 덮여있고, 무대 바닥에 펼쳐진 기하학적 무늬는 이 상황을 더욱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지도록 한다. 고고한 표정과 걸음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마담,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무대에 엎어지자 관객들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이 일순간에 ‘탁’하고 풀어진다. 진지해야 할 장면에선 가구 뒤로 사람들이 벌레처럼 네 발로 기어 다니고, 턱시도를 갖춰 입은 집사는 커피 한 잔 달라며 요청하는 마담에게 “Today is Sunday(오늘은 일요일입니다)”라며 동문서답을 건넨다. 무대 상수로 퇴장한 무용수가 순식간에 하수에서 등장하더니, 벽에 걸려있던 인물화는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에 실제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소파에 누운 남자는 마법처럼 사라지고, 설진을 따라가는 무용수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를 쫓는 듯 불안한 기운마저 풍긴다. 마담 앞에서 아른거리는 두 명의 남자는 한 사람인지, 도플갱어인지, 환상과 실재인지, 그렇다면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무대라는 현실 공간에서 펼쳐지는 작품이지만 어쩐지 이 공간만은 현실이 아닌 듯 느껴진다.


<아 루에>는 작품의 시발점부터 내용 전반에 이르기까지 초현실주의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사조가 벨기에 예술의 주류를 이루던 때로 거슬러 유추해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지배하는 억압된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던 욕망과 당시 등장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은 초현실주의를 탄생하게 했는데, 그 토대가 되는 ‘비틀린 욕망’은 이 작품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론을 통해 “‘욕망’이란 어떠한 욕구를 충족했던 경험을 지각 반응과 결부해 재차 떠올리게 되는 과정”이라 짚은 바 있는데,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존재하는 ‘욕구’와 달리 ‘욕망’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욕망은 현실적으로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무의식 속에서 환상을 통해 일말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각 인물을 훑어보자. 오랫동안 엄마(유리디케)의 눈길 밖에 있었던 아들(조스)의 관심받고자 하는 욕망은 피아니스트가 된 미래의 자신을 현재에 빌려오게 된다. 머리가 하얗게 새 버리고 건반을 누르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조스를 보며 엄마 유리디케가 흡족해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아이러니컬하게 다가온다. 이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환상 속에서나마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마리에게 내재한 에로스적 욕망은 벽에 걸려있는 그림 속 남자를 실재하게 만든다. 그녀는 벽에 걸려있던 인물화에서 튀어나온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데 성공하지만, 손에 쥔 모래알이 스르르 빠져나가 남지 않게 되는 것처럼 남자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소파를 통해 증발해 버린 그의 흔적과 기억은 관객도, 작품도 아닌 마리의 무의식 속에만 남아있다. 이렇듯 <아 루에>는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며 관객 앞에 초현실의 세계를 펼친다.


이런 초현실의 성찬 속에서 관객을 매혹하는 것은 작품의 플롯도, 연출도 아닌, 바로 피핑 톰 무용수들이 선보이는 움직임이다. 작품의 초반에서 테이프를 거꾸로 감는 듯한 이상한 사운드에 맞춰 설진이 등장한다. 마치 빙판에 올라선 듯 고무 소재의 댄스플로어에서 미끄러지며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화려한 발놀림을 선보인다. 이 장면은 그가 작품 중반에 “Follow me(따라오세요)”라고 말을 건네면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한 손에 든 커피잔을 떨어뜨리지 않고 서커스적인 기예를 보여주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런 ‘설진’을 집사로 둔 마리는 어떠한가. 여성성을 부각하기 위해 신었을 구두를 의도적으로 삐걱거리며 아주 어렵게 발모서리로 걷고, 계속해서 무릎으로 바닥에 주저앉는가 하면, 바닥을 짚지 않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등 놀라운 광경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늘 풀이 죽어있는 조스도 설진과 만나면 새로운 움직임의 양상을 펼친다. 두 사람이 론도 형식으로 선보이는 듀엣은 같은 동작을 수행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정방향으로 진행되는 움직임을 역방향으로 거슬러 수행하는 안무는 관객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대목이다.


애크러배틱 요소가 결합된 이들의 춤사위는 기이해서 더욱 매력적이다. 피핑 톰의 젊은 네 명의 무용수가 보여주는 움직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분절의 사용’이라 할 수 있는데, 운동생리학적으로 올바르게 작동 가능한 관절의 가동범위를 이탈하면서까지 신체의 분절을 과도하게 가동한다. 관절이 없는 고무인간이나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처럼 움직이는가 하면, 발등이나 발목을 꺾으면서 일종의 로봇처럼 걷기도 한다. 그 모습이 일반적인 사람의 신체에서 불가능한 것임을 인지하게 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여기에 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무릎으로 착지하고, 손을 짚지 않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위험성 높은 동작까지 더해진다. 피핑 톰의 무용수들이 구현하는 안무는 일률적으로 교육받거나 훈련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동작의 완성도를 위해 수십, 수백 번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육체적 본능을 추구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눈을 오래도록 깜빡이지 않거나, 숨을 코로만 쉬거나, 발목을 끊임없이 굴리며 걷는 등 자신의 몸에 오롯이 집중하면서 신체의 변형을 놀이처럼 다룬다. 동작을 배우고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본능에서 움직임의 당위성을 이끌어 낸다.


피핑 톰의 이런 움직임은 회화와 문학에서 나타나는 기법의 하나인 ‘오토마티즘(automatisme)’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의식이 배제된 상태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는 이 기법은 무용에 있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안무를 이성적으로 통제하지 않고 과감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자면, 작품에 어울리는 형태로 플로어 패턴을 계산하고 안무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몸을 움직여 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무게 중심에 따라 이동 방향을 맡기는 식이다. 피나 바우슈가 자신의 작품을 안무할 때 무용수들에게 주제를 제시하고 그들이 표현하는 움직임을 보면서 영감을 받았던 것처럼, 안무가 가브리엘라 카리조와 프랑크 샤흐티에도 완성된 안무와 동작을 지시하기보다 무용수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이성보다는 감성,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움직임을 구현하면서 몸으로 표현하는 의미와 감정은 무용수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발현하게 되는데, 관객은 그 표현을 재차 곱씹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특히 <아 루에>는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에포트(effort)에서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움직임으로 그려지는 에포트는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의 개념을 넘어서 신체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몇몇 장면에서 그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례로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20대 후반의 아들’ 조스 베이커는 시종일관 김 빠진 모양새로 김설진의 뒤를 따르며 동작을 반복한다. 그런데 작품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솔로 베리에이션에서만큼은 전반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무대 전체를 홀로 조율하며 유리디케에게 관심받지 못하는 괴로움을 오롯이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같은 프레이즈를 여러 신체 방향과 각도로 반복·변주하는 부분이 특히 돋보였는데, 마음 둘 곳 없는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무대 한편에 가만히 서 있거나, 성난 얼굴로 바닥을 내려치거나, 심지어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회전을 반복하기만 해도 그것이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s)’이라는 이름을 달고 당위성을 획득하는 현시대에 피핑 톰이 흘리는 ‘땀’은 관객에게 일전에 느낄 수 없었던 미적 쾌감을 선사했다. 무용수의 몸이 발현하는 움직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들의 움직임은 에포트의 무한한 변화곡선을 그리며 흐름, 힘, 시간, 공간 등 모든 요소의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줬다. 남자 무용수치고 다소 작은 체구의 김설진은 중심에 강한 힘을 갖고 부드러우면서 유연한 흐름의 빠른 움직임을 선보이면서 때때로 슬로모션을 보는 듯 움직임의 정도와 완급을 조절하며 객석의 분위기까지 밀고 당기는 여유로움을 보여줬다. 두어 차례 조스 베이커를 대동하고 잔망스러운 발놀림을 자랑하는 장면은 <아 루에>의 시그니처 동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속도감 있게 움직이는 그의 신체를 따라 시공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장면은 때때로 작품의 흐름을 끊고 앞뒤 장면을 분리하는 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들의 움직임 그 자체는 ‘컨템퍼러리’라 불리는 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새삼 짚어줬다.


이 외에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요소들이 흥미를 더했다. 큰 소파부터 아주 작은 커피잔까지 모든 소품이 작품의 흐름을 연결하는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마담이 재차 집사 설진에게 앉으라고 권하던 소파는 ‘빌린 것’과 ‘환상’을 떠나 무의식과 현재의 세계를 오가는 매개체였다. 몇 번의 권유에서야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자 설진의 몸은 아기처럼 작게 쪼그라드는데, 마담과 사랑을 나눈 후 소파에 누워있던 남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듯 관객은 초현실적인 작품세계를 유영하며 퍼즐을 풀듯 숨겨진 복선을 발견하면서 점차 작품 속으로 깊게 빠져들게 됐다. 해외투어 중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부분도 유쾌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극장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든가(실제 아르코예술극장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오디션에서 유리디케를 제치고 뽑힌 소프라노가 조수미라는 것, 김설진이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세 번은 권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는 장면들이 있어서 작품이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무용이지만 자막을 제공하는 공연이기에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이런 시도는 피핑 톰에서 활약하는 김설진, 정훈목 두 무용수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새삼 세계 무용계에서 한국 무용수들의 위상을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글을 정리하기 위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되짚어보자.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무대 위 등장인물들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이고, 1인용 소파에는 반쯤 빨려 들어간 설진이 자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장면을 길게 늘어뜨린 영상기법을 보는 것 같은 이때, “Stop(그만)”이라는 마담의 한 마디 외침과 함께 극이 종료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었을까. 캄캄한 공허함만이 불 꺼진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 루에>는 모든 것이 환상인 듯한 초현실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날카롭게 현실을 직시한다. 관객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찍으며 시작했지만, 그 마지막에는 결말이 갖는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닫힌 방(Huis Clos)>에서 이야기하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스스로 느끼는 나 자신의 자아는 일치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즉자(卽自)가 아닌 대자(對自)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타인으로서의 시선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몰고 가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피핑 톰의 공연을 본 관객은 사르트르의 지옥을 바로 이곳, 불에 타버린 극장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엇보다 75분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강한 흡인력을 자랑하는 <아 루에>가 복잡한 서사구조를 깔고 여러 극적 상황을 무대 위에서 펼쳐놓으면서도 춤의 본질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관객의 시선을 현란하게 하는 음악, 연극, 영화적 요소와 한데 어우러진 춤은 그 중심을 잃지 않고 작품의 주제를 힘 있게 끌어가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현대예술에 있어 무용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 예술과 융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훌륭한 사례다. 물론, 이것은 세계 무용계를 좌지우지하는 ‘벨기에 무용’의 대표 주자 피핑 톰에 주목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글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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