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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Oct 23. 2016

익숙하고 새로워지기 위하여

브리지트 르페브르에게 묻다

“호기심과 경탄,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
20년간 파리 오페라 발레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브리지트 르페브르의 신념은 확고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 <라 수르스> ⓒJulien Benhamou/Opéra National de Paris


지난 8월, 서울국제무용콩쿠르 발레부문 심사위원으로 국립극장을 찾은 브리지트 르페브르를 만났다. 1995년부터 스무 해 동안 파리 오페라 발레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발레단의 명성만큼 유명해진 그녀다.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를 졸업한 후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무대에 쉼 없이 발을 디뎠고, 1985년 프랑스 문화부 무용담당관, 1992년 가르니에 극장 행정감독을 역임했다. 2014년, 파리 오페라 발레 단장직을 내려놓은 그녀의 행보는 춤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향하고 있다. 최근 칸 댄스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아 2015년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파리 앙상블 오케스트라의 회장이자 리옹 비엔날레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르페브르가 예술감독을 맡은 제20회 칸 댄스 페스티벌은 국립무용단 <회오리>를 개막작으로 초청했다.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이 안무하고 작곡가 장영규가 음악을 빚은, 국립무용단 첫 해외 안무가 초청 프로젝트로 탄생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비행기로 13시간, 물리적 거리를 넘어선 예술적 교감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프랑스 칸과 파리에서 국립무용단의 화제작 두 편을 만난 브리지트 르페브르에게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전통’과 ‘동시대성’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브리지트 르페브르 ⓒ전강인/국립극장


당신을 만나면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다. 국립무용단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파리 오페라 발레의 단장으로 있는 동안 소속 무용수였던 김용걸을 통해 알았다. 그의 아내가 국립무용단의 김미애 단원이지 않은가. 한국 내 국립무용단의 명성이 높다는 것도 들었다.


지난해 칸 댄스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회오리>를 초청했다.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통해 한국의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단순한 사업의 목적이 아니라, 관객에게 새로운 예술과 만남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전통과 현대의 접목에 관심이 많았다. 안무가 테로 사리넨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국립무용단과 함께한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회를 마련했다. 안호상 국립극장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공연뿐 아니라 마스터클래스도 함께 진행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회오리>가 페스티벌의 처음을 여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에게 이렇게 멋진 한

국의 예술을 보여줄 수 있어 기쁘다.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나.

언제나처럼 실제 공연은 큰 감동을 선사했다. 막이 올랐을 때의 강렬한 첫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전혀 몰랐던 영역의 작품이라 그 부분에서 경험하는 놀라움과 깨달음이 있었다. 외국에서 온 안무가와 한국의 무용단, 그리고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악까지. 세 가지 요소의 조화와 강한 결속력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국립무용단의 <회오리>는 테로 사리넨의 기존 작품과 굉장히 다른 작품이더라. 테로 사리넨과 국립무용단 무용수들, 그 극과 극의 만남이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국립무용단 <시간의 나이> ⓒ전강인/국립극장


지난 6월 파리 샤요국립극장에선 조세 몽탈보가 안무한 국립무용단 <시간의 나이>가 공연됐다. 해외 안무가와 한국의 무용단이 만났지만 작품의 스타일은 다른데, 직접 보니 어떤가.

안무가 조세 몽탈보에 대해 무척 잘 알고 있고, 이전에 함께 작업을 한 적도 있다. 도미니크 에르비외와 시대를 함께한 파트너 아닌가. <리라의 웃음(Rire de la Lyre)>(1999)과 같은 파리 오페라 발레를 위한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다. 당시에 그는 굉장히 특별한 방식으로 작업했는데, 그 핵심은 함께하는 무용수들이 갖고 있는 균형을 잃게 하는 것이다. 몽탈보 만의 특별한 안무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무용수의 창조성을 기대하는 한편 그 균형을 잃게 만들고, 그 속에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담아낸다. <시간의 나이> 역시 무용수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번 작품은 성공한 작업으로 평가하고 싶다. 실제 작품을 보면서 그가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으며 무용수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한국의 문화에 진실하게 다가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굉장한 화합이 느껴졌고, 그렇기에 파리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이 과연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이 단지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만남일 뿐 아니라 전 인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들 사이에서 <시간의 나이>는 상이한 평가를 들었다.

맞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견의 차이가 없다면 이상한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안무가가 국립무용단처럼 엄청난 전통을 가진 대형 무용단과 만났을 때, (두 손가락을 이용해 치마를 잡는 모습을 취하며) 이미 그곳엔 일종의 관습(전통)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안무가에게 자극을 주곤 하지만, 무용수들에겐 지워버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시간의 나이>는 전통을 아주 잘 살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파리 오페라 발레의 단장으로 있을 때 무대에 위대한 전통을 내보이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와 동시에 피나 바우슈라든지 새로운 무용수·안무가들과 계속해서 작업하고자 했다.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도전이고, 지속해나가야 할 예술적 제안이기 때문이다.


‘전통의 현대화’가 관객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노력해야 할까.

우선 관객을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이 계속해서 보존되기만 한다면 ‘죽은 전통’ 일뿐이다. 자극을 받아 변화하는 동시에 기존의 강점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전통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아주 작은 새로움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작업을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오래된 것에 새로움을 깃들게 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전통의 현대화’라는 것은 사실 ‘삶의 방식’과 다를 것이 없다. 전통은 살아있는 것이고, 그것이 계속 살아있기 위해선 자극을 받아야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조부모가 손주에게서 자극받는 것처럼…. 새로운 만남이 이뤄질 때, 안무가는 무언가를 주입하거나 기존의 것을 계승하려고 하기보다는 무용수들이 갖고 있는 전통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용수들 역시 새로운 안무가를 만났을 때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라 수르스>의 주역 나일라를 연기한 박세은 ⓒJulien Benhamou/Opéra National de Paris


주제를 한국에서 프랑스로 옮겨보자.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1866년 초연된 <라 수르스>를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신작뿐 아니라 이러한 복원 작업 역시 동시대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질문이다. 발레단을 이끄는 동안 단장으로서 무용수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문제가 있다면 즉각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클래식 발레 안무에 관심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중 한 사람인 장 기욤 바르와 남아있는 텍스트를 토대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라 수르스>(2011)를 완성했다. 그에게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화려한 스타일리스트와 작업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는데, 그게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였다. 그리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의상과 잘 어울릴 심플한 스타일의 무대를 제안했다. 코메디 프랑세즈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에리크 뤼프에게 연출을 부탁하고, 배우 클레망 에르비외 레제르에게 드라마투르그와 대본 작업을 맡겼다. 안무는 장 기욤 바르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잘 해냈다. 완성된 <라 수르스>는 네오클래식 스타일이면서도 (우리가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1866년 초연 당시의 짙은 향수가 느껴진다. 아주 멋지고 신선하면서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무가에 대한 깊은 신뢰가 느껴지는데.

물론이다. 나는 장 기욤 바르를 무용수나 안무가로서 굉장히 신뢰했다. 자주 그랬듯이 그에게 전권을 주고 8명의 무용수가 함께 작업을 하도록 했다. 무엇을 할당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안무를 제외한 의상과 연출에 대해서만 제안을 했다. 이것이 내가 즐기는 업무방식이다.


그간 발레단의 단장 혹은 칸 댄스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다양한 안무가를 초청했다. 함께 작업할 예술가를 찾는 당신 만의 기준이 있다면.

호기심과 경탄,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것.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이 없다면 그들을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다. 모두가 당신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모든 관객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관객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믿는 동시에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해보는 것,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에서 「미르」 발간을 맡고 있다. 제12회 SPAF 젊은비평가상 무용분야 가작을 수상했다.


* 국립극장 「미르」 2016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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