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 ‘쓰리 볼레로’
2017년 6월 2~4일 |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고전은 후대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며, 때론 그 아성을 무너뜨릴 때 더욱 빛나기도 한다. 새로운 예술감독 체제의 국립현대무용단에서 라벨의 ‘볼레로’를 올린다고 했을 때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감인가 싶으면서도 대작곡가의 명작에 기대겠다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왜 ‘볼레로’인가. 국립현대무용단이 이번 ‘픽업 스테이지’의 기획의도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진 않지만, 추측컨대 유독 이 음악을 좋아하는 안성수 예술감독의 영향인 듯싶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계속적으로 ‘볼레로’ 연작을 선보였고, 2006년엔 그중 한 편으로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쓰리 볼레로’라는 공연 제목처럼 세 명의 안무가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세 편의 ‘볼레로’가 무대에 올랐다. 김보람·김설진·김용걸, 안무가의 사진을 전면에 등장시킨 포스터에서 대중을 사로잡겠다는 야심이 엿보였다. 그리고 공연 당일, 극장 로비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라벨의 ‘볼레로’를 좋아하고 이 음악을 바탕으로 한 무용 작품을 몇몇 본 적이 있다면, 공연을 보기 전에 이런 종류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음악을 그대로 사용할 것인가. 베자르의 작품과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할 것인가. 모리스 라벨과 모리스 베자르, 위대한 두 예술가의 업적 덕분에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증폭됐다.
첫 무대를 장식한 김보람의 ‘철저하게 처절하게’는 그 자체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위한 무대였다. 수원시립교향악단 연주자 10명과 지휘를 맡은 박용빈(편곡), 9명의 무용수가 무대 위에 올랐다. 악기별로 한 사람씩 자리한 덕에(바이올린 2명) 음악을 이루는 각 악기의 음색을 더욱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는데, 모든 현악기가 피치카토로만 연주하거나 피아노 독주를 배치하는 등 약간의 변형만으로 기존의 ‘볼레로’를 새롭게 들려준 것이 신선했다.
화이트 슈트에 블랙 선글라스, 늘 그랬듯 화려한 컬러의 수영모를 뒤집어쓴 무용수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으며, 유쾌했다. 특히 주선율에 맞춰 반복적으로 머리-어깨-골반-무릎-발을 차례로 짚는 동작―동요 ‘머리 어깨 무릎 발’을 떠올려보자―은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볼레로’의 특징을 잘 살린 부분이었다. 다만 개인의 움직임이 점차 전체로 확장되는 구도나, 타악 리듬에 맞춰 신체 분절을 활용한 동작, 마지막에 다다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모두가 쓰러지는 장면 등 전반적으로 예상했던 플로우를 벗어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첫 공연이 끝난 뒤, 무대 전환이 이뤄졌다. 관객이 무대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조명을 밝혔고, 블랙 댄스플로어를 걷어내고 화이트 댄스플로어를 새롭게 까는 동시에 테크니컬 데스크가 들어왔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능숙하게 테이프를 제거하고 새로운 플로어를 펼치는 무대 스태프의 모습은 마치 숙련된 무용수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았다. 녹음된 생활소음이 막간 공연의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고, 무대 작업 과정은 퍼포먼스를 펼치는 무용수들로 자연스럽게 치환되며 본 공연으로 이어졌다.
김설진의 ‘볼레로 만들기’는 라벨의 음악을 완전히 새롭게 조립했다. 전반적인 콘셉트 자체는 2013년 내한한 윌리엄 포사이스의 ‘헤테로토피아’와 흡사했다. 우연을 표방한 철저하게 계산된 움직임, 무대라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상황에 맞춰 사운드를 조율하는 모습. (다만 무대를 오가며 전체를 조율하던 포사이스와 같은 존재가 없을 뿐.) 잿빛 양복을 입은 여섯 명의 무용수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풍경을 그려낸다. 일상적인 움직임에서 모티프를 얻어 동작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조합해 장면으로 완성했다.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던 것은 무대 상수 쪽에 위치한 테크니컬 데스크였다. 리브투더의 정종임·최혜원은 온갖 사물이 늘어져있는 이곳에서 20분간 쉬지 않고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일상에서 종종 대중가요의 한 소절을 흥얼거리거나 어떤 음악의 구절을 나도 모르게 되뇌는 것처럼, 이들은 일상의 사운드를 모아 라벨의 ‘볼레로’를 만들었다. 자동차와 대형버스가 수없이 지나다니는 어느 대로변에서 누군가 흥얼거리는 휘파람 소리로 ‘볼레로’를 불러낸다. 녹음된 사운드는 실시간으로 축적되고 변형되며 새로운 음악이 되고, 무대 공중에 마이크를 달아 현장에서 발생하는 소음도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마치 영화의 사운드 믹싱 과정처럼 천을 문질러 소리를 내고, 우산을 접었다 펴거나,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농구공을 바닥에 튕기며 리듬을 쌓는다. 철저하게 준비된 과정이겠지만, 이 모든 것이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는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더욱 흥미진진 만든다. 한구석에 설치된 모니터에선 음악을 쌓는 과정이 생생하게 중계되고 있다. 판자에 질끈 묶은 7개의 줄로 7음계를 연주하고, 카메라 셔터를 반만 눌러 알림음을 섞는 등 사운드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기발하다. 이렇게 점차 익숙해진 ‘볼레로’는 갑자기 ‘축혼행진곡’으로 길을 틀면서 관객의 폭소를 유발하기도 한다. 마지막을 아박과 태평소로 장식한 것도 인상 깊었다.
김용걸의 ‘볼레로’는 규모 면에서 우선적으로 눈길을 끈 작품이다. 38명의 무용수와 수원시립교향악단이 CJ토월극장 무대를 가득 채웠다. 무대 뒤 백스테이지로 사용되던 공간을 열어 오케스트라가 자리하니 시각적으로 압도할 수밖에. 안무가 김용걸은 ‘Work’ 시리즈를 비롯한 자신의 안무작에서 선보인 발레어법을 이번에도 충실히 따랐다. 줄지어 선 무용수와 오케스트라, 군무와 중앙에 선 솔리스트 등이 고전발레의 형식을 연상케 했다. 라벨의 ‘볼레로’는 수원시향에 의해 연주됐다. 반복의 지루함을 피하고 역동성을 가미하기 위해 빠르기 정도만 조정됐는데, 스네어 드럼과 관악기 독주의 박자가 맞지 않아 음악이 어그러진 것이 안타까웠다.
“저는 베자르의 볼레로를 추기 싫었거든요. 그 시대에 그런 작품을 만든 센세이션에 대한 경의는 있지만, 군무 입장에선 너무 단순해요. 다른 유명 안무가들도 그들의 큰 권력을 이용해 여자를 껴안은 거 같은 느낌이라 별로 맘에 안듭니다.”(중앙SUNDAY, 2017년 5월 28일)
김용걸은 공연 전 가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품이 모리스 베자르와는 다른 형식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김용걸의 ‘볼레로’는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에 대한 오마주에 가까웠다. 맨 첫 장면에서 무용수의 손과 발만 보이도록 한 것은, 중앙에 선 무용수의 손을 스포트라이트로 비추다 점차 그 범위를 확장시키는 베자르의 연출과 너무나 흡사했다. 시작이 그렇다 보니 한 명의 무용수를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고 중앙으로 모여서 마무리 짓는 구도와 상의를 탈의한 듯 보이게 하는 의상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인터뷰나 기획의도를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면 베자르에 대한 오마주로 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동시에, 스스로 주인공이 된 김용걸을 보며 그가 꼭 무대에 섰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물론 그를 비롯한 세 작품의 안무가가 모두 출연했다. 하지만 김보람과 김설진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 무용수고, 김용걸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무용가로서 김용걸은 뛰어나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그저 수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인 교수로 보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발레 기본동작 사이에 삽입된, ‘백조의 호수’를 흉내 내며 두 팔을 파닥이거나 한국무용 동작을 우스꽝스럽게 비튼 동작도 의도를 파악하기에 앞서 미간을 찡그리게 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쓰리 볼레로’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콘셉트의 ‘볼레로’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공연이었다. 이미 유명한 이들을 데려다 공연을 꾸리는 것이 국립단체의 역할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국립현대무용단이기에 가능한 큐레이션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기획공연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다. 또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를 지켜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라는 거대한 틀에도 불구하고 세 단체(안무가)의 또렷한 색깔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 안성수 예술감독의 신작 ‘제전악-장미의 잔상’과 이후 세 번의 픽업스테이지, 그 외 여러 공연을 통해 올 한 해 국립현대무용단이 어떤 모습을 만들어 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