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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May 13. 2017

감각을 깨우다

국립무용단 ‘시간의 나이’ 연습실 관찰기

놀랍고, 흥미롭고, 유쾌하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이제 세 번째 공연을 앞두고 있는 국립무용단 연습실을 급습했다.


국립무용단 연습실이 위치한 관리동 4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걸음을 떼자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전해진다. 디귿자 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양쪽에 두 개의 연습실이 나타난다. 무용단 연습실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반만 열린 문을 통해 그 현장을 들여다봤다.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 ‘시간의 나이’ 초연을 앞두고 작업에 함께한 조안무가 조엘 이프리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륜에 한 번, 연습을 지도하는 열정적인 트레이너의 모습에 두 번 놀라게 한 그녀가 재공연을 앞두고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다. 작년 이맘때 바로 이 공간에서, 힘이 넘치면서도 완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그녀의 열정적인 춤사위를 보고 혀를 내둘렀더랬다. 사계절이 지났지만 그 시간이 그대로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 모습에 사로잡혀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들어가 연습실 한구석에 앉았다.


이날은 조엘 이프리그와 국립무용단 단원들이 재회한 날이었다. 지난해 6월, 프랑스 파리 공연 이후 오랜만의 만남. 꼬박 10개월 만이지만 마치 지난주에도 만났던 것처럼 화기애애했다. 공연을 보름 앞두고 있기에 인사를 나누자마자 연습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무용수들을 향해 조안무가가 말을 꺼냈다. 파리 공연을 토대로 작품 전체를 짚어보고, 이번 서울 공연에서 수정할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표현상 강조해야 할 부분은 구체적으로 해당 무용수의 이름을 부르며 꼼꼼하게 체크했다. 초연 당시 시간적인 한계로 완성도가 다소 미진했던 부분을 더욱 세밀하게 맞추기 위함이라고 했다. 파리에서부터 준비해 온 세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숨 쉴 틈 없이 전달한 조엘 이프리그가 드디어 말을 마쳤다. “제가 지금 말이 좀 많은데, 하다 보면 금방 습득할 수 있을 거예요.” 이것쯤 대수롭겠느냐 싶은 그녀의 표정에서, 작품을 만들 때부터 밀접하게 소통해온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이기에 이런 상황이 가능한 것이구나 싶었다. “그럼 원래 하던 대로 몸을 풀어볼까요.”


스피커를 통해 흥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진지한 척 노트를 펼치고 현장을 관찰하던 나도 어느새 리듬을 타고 있었다. 매일 오전 10시, 이곳에서 알람처럼 반복되는 한국무용 기본은 당연히 아니다. 발레도, 힙합도, 현대무용도 아니다. 눈앞의 풍경이 참으로 생경한 나와 달리 무용수들은 그 독특한 움직임이 익숙해 보였다. 두 무릎을 구부려 호흡은 배꼽보다 아래쪽에 두고, 거대한 짐볼을 하나씩 안고 굴리듯이 온몸을 둥글게 만든다. 음악처럼 몽글몽글한 움직임이 마구 빨라지다가, 한없이 늘어지다가, 꿀렁인다. 전면 거울에 비친 무용수들의 상기된 표정에 서 ‘다시 시작’이 읽혔다.



몸의 온도가 얼추 오르고,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스텝을 되짚어본다. 기억하냐는 듯 조엘 이프리그가 눈빛을 보내자 무용수들이 바로 구음을 붙여가며 동작을 선보인다. 엄지 척! 몇 개의 프레이즈를 연달아 반복하면서 무용수들이 합심한 듯 동작에 속도를 마구 붙인다. 마치 몸이 기억하는 본능과 감각을 깨우기라도 하듯이.


“하! 하! 하! 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용수들이 합을 맞춘다. 가쁜 호흡을 내뿜던 윤성철 조안무는 “기억나죠? 얼마나 힘들었는지?”라며 초연 당시를 떠올린다. 그 모습이 마냥 힘들어 보이지 않은 건, 단지 가만히 앉아서 관찰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터. 오히려 재공연을 앞둔 흥분과 설렘처럼 보였다.


이윽고 연습실 한편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공연 실황 영상을 재생해놓고 이에 맞춰 전체 작품을 훑는 과정이 진행됐다. 맨발, 양말, 재즈화, 티칭슈즈, 운동화까지. 무용수의 가지각색 발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발가락으로는 박자를 세고, 뒤꿈치로는 장단을 맞춘다. 헬륨가스를 잔뜩 들이마신 듯 가뿐한 몸이 발바닥의 탄력을 받아 높게 뛰어오른다. 조안무가는 별다른 지시 사항 없이 종종 고개를 끄덕였다. 무용수들의 들숨과 날숨을 통해 지난 공연의 감각을 조금씩 찾아가는 시간. 여성 무용수의 손에 들린 빨간 부채와 남성 무용수의 팔 끝에 이어지는 하얀 부채가 화려하게 나부끼며 1장이 끝났다. 조안무가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안무가의 손짓, 무용수의 기억을 끌어내다

연습실의 풍경은 실제 공연과 꼭 닮았다. ‘시간의 나이’의 핵심은 한국 전통춤의 해체와 재조합, 영상과 춤의 컬래버레이션이 아니라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의 긴밀한 상호 교류를 통한 협업에 있다. 연습 과정을 관찰하며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안무가가 동작을 제시하지 않고 무용수로부터 끌어내는 부분이다. 단편적으론 피나 바우슈의 작업 방식과 흡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조세 몽탈보는 무용수의 감정과 표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들에게 축적된 유산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새로운 동작에선 원형이 되는 움직임의 흔적이 발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도 흥미롭다. 이날 연습에선 조안무가가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무용수들이 안무를 만들고, 함께 머리를 맞대어 기존의 프레이즈에 재밌는 변주를 가하기도 했다. “과거를 축적해가며 새로운 것을 완성한다.” 조세 몽탈보가 작품 제목에 부여한 의미가 바로 이 연습실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종종 연습 현장이 토론의 장으로 바뀌기도 했다.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이에 따라 거침없이 수정과 변형이 진행됐다. 몸짓과 구음과 토론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몸으로 이야기하는 이들답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통했다.



2장에 등장하는 화관무를 변형한 장면이 한창 연습 중인 가운데, 지도를 맡은 김미애가 공연 영상을 돌려보며 동작을 연구하고 있다. 올해로 입단 20년, 무용단의 중심에서 여러 안무가와 수많은 작품을 경험한 그녀에게 ‘시간의 나이’는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다른 작품과는 완전히 달라요. 이전에 했던 작품들이 무언가 주어지면 습득해서 보여주는 과정이라면, ‘시간의 나이’는 모든 무용수가 창작자의 마인드를 갖고 참여했어요. 안무가가 제안을 하면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을 많이 했죠. 모두가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거예요.”


실제 공연을 관람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1막 듀엣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김미애는 요즘 이 부분을 어떻게 바꿀지 한창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안무가가 이 듀엣이 춤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란다고 하더라고요. 좀 더 디테일하게 수정해서 두 무용수의 속도감 넘치는 대화처럼 만들어보려고 해요. 재공연은 이런 부분이 재밌어요. 무대에서 실제로 공연하면서 경험한 무용수의 노하우가 반영되는 거죠. 작품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고, 이에 따라 스스로 가미하는 것들이 생겨요. 이번 공연은 더욱 완성도 높은 무대가 될 거예요.”


조세 몽탈보는 ‘시간의 나이’를 창작하면서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우리 무용수들이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언어의 차이를 초월하고 문화의 다름을 해소하며 서로를 탐구해온 시간이 이 작품을 완성하는 바탕이 아니었을까. 영상 속 전통복식을 한 무용수와 무대 위 실제 무용수가 동시에 같은 춤을 추는 1장의 주요 장면에 대해 몽탈보는 “새로운 기억을 장착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언급했다.


작품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국립무용단 무용수들 역시 ‘시간의 나이’를 통해 기존의 작업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창작 경험을 갖게 됐으니 말이다. 서울과 파리, 그리고 다시 서울로 이어지는 무대에서 축적된 시간의 진가가 발휘될 것으로 기대된다.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2015년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전강인


※국립극장 「미르」 2017년 5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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