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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희 Apr 09. 2017

또 왔다네, 그 여인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갑오년·을미년·병신년, 그리고 정유년. 오뉴월만 되면 모두를 설레게 하는 ‘옹녀’가 올해도 돌아왔다네.


여보시게, 그 소식 들었는가? ‘옹녀’가 돌아왔다네. 작년에 우리 동네는 물론 불란서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여인 말일세. 에? 표정이 왜 그런가? 아니, 아직도 ‘옹녀’를 모른단 말인가? 갑오년 장충동 국립극장에 처음 등장해 이듬해 을미년과 병신년, 그리고 올 정유년까지 오뉴월마다 찾아오는 그 여인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허참, 안타깝구먼. 내가 설명해줌세!



갑오년 중하(中夏), 달오름극장에 처음 오른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오래전부터 외설스럽게 찔끔찔끔 불려오던 ‘변강쇠타령’을 요즘에 맞게 새로 만든 창극이라네. 변강쇠가 아니라, 인생을 개척하는 옹녀가 주인공으로 나섰지. 흔히들 남정네가 여인들 이야기를 함부로 다루면 자칫 욕먹기 십상인데, 요 작품은 아닐세. 여인네는 물론 사내들도 극장에 갔다 오기만 하면 아주 애정이 싹틀 정도라고 그러대.


그 비결이 무언가 했더니 극(劇) 잘 만들기로 유명한 두 사내가 아주 작정하고 만들어서 그렇다고 하드만. 고선웅과 한승석, 동갑내기인 데다 아주 사랑꾼이라고 여인네들이 쑥덕이는 걸 들었네. 아무튼, 대본을 쓰고 연출도 맡은 작자를 만나서 물어봤더니 이게 그 ‘옹녀 명예 회복’을 위한 일거리라고 그러더군. 변강쇠의 시대는 아주 쫑났고, 이제 옹녀의 시대가 온다 이거야. 이놈이 아주 옹녀한테 푹 빠진 것이 분명햐.


이야기도 그렇지만 창극에 나오는 노래가 겁나 재밌다네. 소리하고 음악을 만든 한승석은 중앙대학교에서 음악 가르치는 선생이라는디, 그래서인가 실력이 아주 출중하더구먼. 쿵떡쿵떡 흥겨운 우리 음악도 나오고 최희준이 부른 트로트 ‘하숙생’도 나오고, 우리 같은 서민들이 만날 불러재끼는 민요랑 비나리도 나오네. 또, 서양서 물 건너온 ‘카르미나 부라나’에 나오는 비장한 음악이 가야금으로 띵가띵가 연주되는데 어찌나 재밌는지. 그 제목이 ‘오, 운명의 여신이여’라더군. 아무튼 이것들이 다 합쳐져서 지루하지 않고 거 아주 흥이 돋는다네.


요즘 세상 사는 게 그렇지 않은가. 여인네들이 만날 넋두리하는 것 말일세. 생각해보면 사내나 여인이나 같은 것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차별하고 막 대하고 그러지 않나. 능력이 있어도 남정네들이 만들어놓은 한계에 부닥치고, 약하다고 짓밟히고, 손가락질 당하고… 생각하니 또 약초를 씹은 것 마냥 씁쓸하구먼. 하여간 그래서 이 ‘옹녀’가 더 인기라 이거야. 상부살에 역마살 품고도 거친 세상 홀로 헤치며 걸어온 이 여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고나면 반할 수밖에 없다네. 아주 뜨겁기론 이만치 화끈할 수 없고, 당차기론 이만큼 호방할 수가 없네. 아참, ‘18금’이라 애들은 못 본다네. 그래서 더 궁금하다고? 그럼 내가 중요한 장면 몇 개 더 얘기해주겠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사진=전강인/국립극장)


옹녀 손아귀에서 관객을 쥐락펴락

텅 빈 무대 위에 작은 멍석 한 장 깔려 있고, 삼베 상복 입은 옹녀가 홀로 등장. “옹녀, 문안이오”라며 반절하고 앉아 저를 소개하기 시작하는디, 꾀꼬리 같은 목소리·콧소리가 어찌나 곱고 색기 넘치는지…. 극중에서 왜 그 많은 사내들이 턱하니 넘어갔는지 알겠더만. 간드러지는 소리로 대사를 읊다가 장단이 갑자기 바뀌니 옹녀도 목청을 가다듬고 신세를 한탄하는데, 그 목소리는 꼭 여장부의 외침 같았다네. ‘외유내강’이라는 말 있지 않은가. 그게 딱 옹녀를 가리키는 것 같더구먼. 옹녀를 탐하는 남정네들이 이 여인을 둘러싸고 여러 말 씨부리는데 거참 부끄러운 줄 모르고 거침없어라.


아낙들의 쑥덕공론에 옹녀가 마을을 떠나고 나면 변강쇠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구먼. 여러 여인 홀려 하룻밤 풋정 나눈 주제에 한다는 말이 “여자라는 게 본시 사랑을 받자고 태어났고 남자라는 게 본시 사랑을 하자고 태어났는디… 나 같은 떠돌이는 모두 잊고 사내들은 더욱 분발하고 아녀자덜은 가끔 공갈 연기도 하며 사랑들 하고 사시오 그려.” 하, 말 한번 맛깔나게 하잖는가.


남으로 가던 옹녀와 북으로 가던 변강쇠가 청석골에서 만나는데, 가운데가 동하더니 어이쿠 이내 신방을 차리는구먼. 누가 변가 아니랄까봐 그 일부터 치르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노래가 바로 ‘기물가’라네. 남세스러워 말게. 곰곰이 듣다보면 그 묘사와 문장력에 감탄하게 될 터이니. ‘기물가’가 끝나면 둘이서 좋아가지고 뱅글뱅글 돌며 ‘사랑가’를 부르는데, 마음 한구석이 절절해지는 것이 ‘그 노래’보다 더 요망하다네. 본디 ‘사랑가’에는 정분이 담뿍 담겨 있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그란디 옹녀의 ‘사랑가’는 절절하면서도 아름답고 눈물이 똑 맺히는 것이 마음이 이상할 정도라네.


‘변강쇠 점 찍고 옹녀’(사진=전강인/국립극장)


그러다가 풍악이 신나게 울리면 도방살이 장면이 시작되는데, 여긴 꼭 우리네 민초의 삶을 보는 것 같네. “아라리요 아라리요 에헤라 원산이야.” 투전판에서 놀아나는 변강쇠를 보고 있으면 혀를 끌끌 찰 만큼 한심해 죽겠구먼 옹녀는 그래도 지 지아비라고 “그래도 좋네. 저기 가는 사내 뒤태가 나는 좋아”라며 뒷돈을 대주는구먼. 아이고, 저 돈 다 아까워서 어쩐디야.


그렇게 돈푼 모으기는커녕 쫓기듯 떠나 산중생활을 시작하는디. 이놈 변강쇠는 일해서 먹고 살 생각은 없고 춘정만 동하는 것이… 쯧쯧. 낭구 하러 나갔다가 낮잠만 퍼질러 자고 장승이나 뽑아오는 변강쇠 대신 옹녀는 새벽부터 일어나 산나물 캐고 버섯도 따고 열심히 산과 밭을 일군다네. ‘변강쇠타령’이 아니고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인 이유, 이제 좀 알겠는가?


하여간에 낭구 대신 장승을 뽑아온 변강쇠는 결국 동티가 나서 죽은 것도 아니고 죽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드러눕는다네. 옹녀가 어떤 여인인가, 백방으로 수소문해 함양 잣바재 혜민서의 젊은 의녀를 찾아갔구먼. 그나저나 이 의녀, 그냥 봐도 매우 신박한 의술을 펼칠 것 같은 모습일세. 하여간 의녀와 세 명의 수련의가 치료를 시작하는디, 각종 약재 이름을 줄줄이 읊고 장단에 맞춰 읊고 음률에 맞춰 읊고…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순 없다만 여간 신기하다네. ‘북치기 박치기’ 한다고 폼 잡는 요즘 애들도 울고 갈 실력일세.


‘변강쇠 점 찍고 옹녀’(사진=전강인/국립극장)


벌써 막바지라네. 남편을 ‘또’ 잃은 옹녀는 눈에 뵈는 게 없어 장승을 불태워 싸그리 없앨 계획을 세운당께. 여인의 한(恨)은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한다더니, 실상 어마어마하구먼. 적삼은 풀어헤치고, 콧소리를 섞고, 상청으로 노래하며 온갖 장승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글쎄 장승만 아니라 사람도 넘어가겄소.


그리하여 결말이 어떻게 났는가. 본래 ‘변강쇠타령’에선 옹녀가 여덟 송장을 치르느라 땀 뻘뻘 흘려가며 시간을 보내지만 여기선 다르다네. 궁금하면 직접 가서 보고 오게.


“서방님, 부니 나를 음탕하다 마시고 밤이면 밤마다 정령으로 찾아오시어 마음을 함께하고 이승 저승 넘나들며 부디 사랑하여주오.”


아, 옹녀는 참말로 아름답고 당찬 여인 아닌가. 아무튼 내 설명은 들을 만했는가? 아무리 설명해도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네. 장단 맞춰 어깨 들썩이며 쿡쿡대다가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한 마디, 한 문장에 어찌나 뜨끔하던지. 거 앞뒤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내뱉는 노랫가락에 얼굴이 붉어지다가도 껄껄 웃게 되는 것이… 아주 사람을 오락가락하게 하는 묘미가 있어라. 남녀가 손을 꼭 잡고 보면 좋겠네. 그뿐인가, 붕우끼리도 좋고 부자와 모녀 간도 참 좋겠네. 특히 여인네라면 두 번 보게나.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 이토록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고 있으니 말일세.


글 김태희 국립극장 홍보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를 졸업하고 서울문화재단을 거쳐 「미르」 제작을 맡고 있다. 2015년 제12회 SPAF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일시    2017. 4. 28(금)~5. 6(토) 화·수·주말·공휴일 오후 3시, 목·금 오후 8시
장소    달오름극장
관람료  R석 5만 원, S석 3만 5천 원, A석 2만 원
문의    국립극장 02-2280-4114


※국립극장 「미르」 2017년 4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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