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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스타 May 06. 201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1.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가는 물론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한 두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도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그 나름의 재능은 물론 필요하고 그만그만한 기개도 필요합니다. 또한 인생의 다른 다양한 일들과 마찬가지로 운이나 인연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어떤 종류의 '자격'같은 것이 요구됩니다. 이건 갖춰진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고,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갖춰진 사람도 있는가 하면 후천적으로 고생고생 해가며 습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7p


*어떤 직업군이건 어느 정도 필요한 소양이 있는데, 소설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보다. 


2.

이제 아마도 일반 서점에서 입수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소설가의 정원은 한정이 없지만 서점의 공간은 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19p


3. 

하지만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혹은 스토리를 풀어간다는-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실감으로 말하자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를지도 모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느리다,

라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 그런 느린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20p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볼 수도 없고 상당히 긴 준비기간과 전개 과정에서의 풀어내감의 속도의 강약을 맞출 수 있어야 하는 이야기 


4.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이십 년 삼십 년에 걸쳐 직업적인 소설가로 활약하고, 혹은 살아 남아서 각자 일정한 수의 독자를 획득한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뭔가 남다르게 강한 핵core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 drive. 장기간에 걸친 고독한 작업을 버텨내는 강인한 인내력. 이건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자질이자 자격이라고 딱 잘라 말해 버려도 무방할 것입니다. 28p


*소설가 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적인 충동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이런 충동을 '크리에이터 성향'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나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표현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낀다. 글쓰기와 그림그리기가 이에 해당된다. 


5. 

"...어디까지나 눈대중에 지나지 않지만, 습관적이고 적극적으로 문예 서적을 읽는 층은 일본 전체 인구의 5퍼센트쯤이 아닌가하고 나는 추측합니다.독자 인구의 핵이라고 할 5퍼센트입니다. 요즘 책에 무관심하다, 활자에 무관심하다, 라는 얘기가 자주 들리고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5퍼센트 전후의 사람들은 설령 '책을 읽지 마라'고 위에서 강제로 막는 일이 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처럼 탄압을 피해 숲에 숨어 모두 함께 책을 암기한다-라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몰래 숨어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을까요. 물론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책을 읽는 습관이 일단 몸에 배면-그런 습관은 많은 경우 젊은 시절에 몸에 배는 것인데-그리 쉽사리 독서를 내던지지 못합니다. 가까이에 유튜브가 있건 3D 비디오게임이 있건 틈만나면(혹은 틈이 나지 않더라도) 자진해서 책을 손에 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스무 명에 한 명이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책이나 소설의 미래에 대해 내가 심각하게 염려할 일은 없습니다.P76


*습관이라는게 정말이지 들기도 어렵고 고치기도 어렵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게 습관인데, 자신을 의식적으로 바꾸려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도 어렸을 적 부터 습관을 들인 독서 습관이 있지만, 스마트폰이 자꾸만 나를 방해한다. 디지털 세대로 살아가면서 아에 끊어버리 Disconnect은 어려울지라도 많이 줄여나가고 있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빡독데이를 진행함으로써 독서에 다시 한 번 빠져들 수 있는 경험이 되고 있다. 


6.

원래 분쟁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정말입니다) 그러한 '관례''문학계의 불문율'을 거스르겠다는 식의 의식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일단은)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내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대로 해나가면 된다.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쥴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105p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다보면 그가 보수적인 일본 문단에서 어떻게 내면을 강력하게 구축해 나갔는지에 대한 사고가 옅보이는데, 이 '작가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가 그 중 하나다. 수용하고 받아들이되 너무 휘말리지는 말자 그리고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쥴에 따라 쓰는 것. 뒷부분에도 나오겠지만 이런 단단한 내면을 구축하려고 하루키는 자신을 일부 제한적으로 행동하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 했다. 환경 설정과 FM처럼 보이는 리츄얼을 반복 했다. 단단한 내면은 건강한 신체와 정신에서 비롯된다는 부분도 그에게 해당 된다. 


7.

하지만 그런 다이내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소설을 쓸 수 있다, 라는 것을 나는 개인적으로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어떤 소소한 경험에서라도 인간은 방법 여하에 따라 깜짝 놀랄만큼 큰 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부석침목'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 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데, 소설 세계에서는 혹은-예술 세계에서는, 이라고 말을 바꿔도 무방한데-그런 역전 현상이 실제로 자주 일어납니다. 통상적으로 가벼운 것으로 취급되던 것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획득하고, 일반적으로 묵직하다고 여겼던 것이 어느새 그 무게를 잃고 형해만 남습니다. 지속적 창조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시간의 도움을 얻어 그런 과격한 역전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소재가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약간만 시점을 바꾸면, 발상을 전환하면, 소재는 당신 주위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눈길을 받고 당신의 손에 잡혀 이용되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의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실은 그런 흥미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이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키포인트입니다. 


 이건 오랜 나의 지론인데, 세대 간에 우열 따위는 없습니다. 어느 한 세대가 다른 한 세대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 라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세간에서는 스테레오타입의 세대 비판이 자주 들려오지만 그런 건 전혀 의미 없는 공론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각각의 세대 간에는 우열도 없고 상하도 없습니다. 물론 경향이나 방향성에는 저마다 차이가 있겠지요. 그러나 질량 그자체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혹은 굳이 문제로 삼을 만한 차이는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를 들어 요즘 젊은 세대는 한자를 읽고 쓰는 능력에 있어서는 선행하는 세대보다 약간 떨어질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를테면 컴퓨터 언어의 이해 처리 능력은 틀림없이 선행하는 세대보다 뛰어나겠지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것입니다. 각각 잘하는 분야가 있고 잘 못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냥 그뿐입니다. 그렇다면 각 세대는 뭔가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각자 '잘하는 분야'를 척척 전면에 내세우면 됩니다.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세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한 반대로 묘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삼십오 년 전이지만 그 당시에 '이건 소설이 아니다''이런 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선행하는 세대에게서 엄격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어쩐지 부담스러워서(라고 할까, 귀찮아서)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본을 떠나 외국의 잡음 없는 조용한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혹시 내가 잘못하는 건가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딱히 불안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실제로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밖에 별도리가 없잖아. 그게 뭐가 나빠?'하고 모른 척 넘어가버렸습니다. 아직은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쯤에는 시대도 변화를 달성할 것이고 내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어째 좀 낯 두꺼운 소리 같습니다만. 139p


*어느 세대간에 우열이 없다는 부분이 가장 크게 와닿는다. 회사만 해도 다양한 세대가 조직이라는 체계 아래서 일하고 있는데, 광고 업계 특성상 자신의 의견과 경험을 얘기하다 보면 흔히 말하는 세대차이라는 걸 느낄 때도 적지 않다. 얼마전에 팀장님과의 아이데이션 미팅에서도 '요즘애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가'로 시작되는 문장을 몇차례 들었다. 그들에겐 그들이 축적한 경험이 있을테고, 기성세대만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시각이 때로는 큰 도움이 될 때도 많다. 하지만 그 전에 서로의 세대를 '어찌됬건 너와 나는 이렇게 다르구나. 그렇구나. 받아들이자. 인정하자.'라는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다. 너는 이런걸 잘하고 나는 저런걸 잘하니 우리 서로 잘하는걸 이렇게 저렇게 맞춰가 볼까?라는 개방적인 사고가 정말 필요하다. 결이 다른 이야기 일수도 있겠지만, 세대간에 우열은 없다라는 말은 다양한 연령대가 일하는 조직에서 꼭 깊숙히 지녀야 할 마인드이다. 


8.

 몇 번이나 퇴고를 해야 하느냐, 라고 물어도 정확한 횟수까지는 잘 모릅니다. 원고 단게에서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쳤고, 출판사에 건너가 교정지가 된 다음에도 상대가 지겨워할 만큼 몇 번씩 교정지를 내달라고 합니다. 교정지를 새까맣게 해서 돌려주고, 그렇게 해서 재차 보내준 교정지를 다시 새까맣게 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고통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문장을 수없이 다시 읽으면서 여운을 확인하고 말의 순서를 바꾸고 세세한 표현을 변경하는 등의 '망치질'을 나는 태생적으로 좋아합니다. 교정지가 새까매지고 책상에 늘어놓은 열 자루 정도의 HB 연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큰 희열을 느낍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일이 진짜로 재미있어요. 하염없이 하고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습니다. 


*하루키가 대단하다고 느낀 대목이다. 수정과 교정의 과정을 태생적으로 좋아한다니.. 대단하다. 일하는 입장에서 무언가를 다시한다는 건 제일 짜증나는 대목 중에 하나인데(빨리 달라고하면 더 짜증남), 망치질을 태생적으로 좋아한다니. 이런 태도와 마인드를 나도 탑재시켜야 할텐데. 


9.

시간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소중한 요소입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사전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할 소설의 싹을 틔우고 통통하게 키워가는 '침묵으 기간'입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기분을 내 안에 서서히 만들어 갑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 들이는 시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일으켜나가는 기간, 일어선 것을 냉암소에서 진득하게 '양생하는' 기간, 그것을 밖으로 꺼내 자연의 빛을 쏘이고 단단히 굳어져가는 것을 세세히 검증하고 쿵쾅쿵쾅 망치질을 하는 시간 그런 과정 하나하나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쓰냔 아니냐는 오로지 작가 본인만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릭 그런 작업 하나하나에 들인 시간의 퀄리티는 틀림없이 작품의 '납득성'이 되어서 드러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짇 모르지만 거기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166p


*작품의 '납득성'.... 그곳에는 역력한 차이가 발생한다. 작가도 알지만 독자는 더더욱 잘 안다. 


10.

그래서 나는 내 작품이 간행되고 그것이 설령 혹독한-생각도 못할 만큼 혹독한-비판을 받는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할 만큼은 했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전 작업에도 양생에도 진득하게 시간을 들였고, 망치질에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는. 그래서 아무리 혹독한 비판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자신감을 잃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물론 약간 불쾌해지는 정도의 일은 가끔 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시간에 의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을 그러한 확신이 내 안에 없었다면 아무리 배짱 좋고 태평한 나라도 어쩌면 침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는 확실한 실감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그다음은 시간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곧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여성을 대할 때와 똑같은 일이지요. 

 앞서 얘기했던 레이먼드 카버는 한 에세이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연해진다.(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해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라고.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아마 좀 더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 (졸역 [글쓰기에 대하여]) 레이먼드 카버 168p


11.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자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시간에 컨트롤 당하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는 역시 수동적이 되고 맙니다. '시간과 밀물 썰물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쪽에서 기다릴 생각이 없다면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이쪽의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수동적이 아니라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도전해가는 것입니다. p169


*시간이 기다릴 생각이 없다며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나의 스케쥴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수밖에 없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현재 작성하고 있는 데일리 리포트와도 같은 맥락 같다. 어떻게 내가 시간을 쓰고, 이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서 적극적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것. 


12

 고독한 작업, 이라고 하면 너무도 범속한 표현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특히 긴 소설을 쓰는 경우에는-실제로 상당히 고독한 작업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라고 어꺠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물인 작품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물론 잘되면), 그것을 써내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딱히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 혼자서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나는 그런 쪽의 작업에 관해서는 상당히 인내심 강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때로는 지긋지긋하고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 또 하루, 마치 기와 직인이 기와를 쌓아가듯이 참을것 있게 꼼꼼히 쌓아가는 것에 의해 이윽고 어느 시점에 '그래,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작가야'라는 실감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감을 '좋은 것' '축하할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미구그이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하루씩 꾸준하게)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작업을 인내심을 갖고 꼬박꼬박 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말할 것도 없이 지속력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의식을 집중하는 건 사흘이 한도, 라는 사람은 도저히 소설가는 될 수 없습니다. 사흘이면 단편소설은 쓸 수 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 맞는 말입니다. 사흘이면 단편소설 한 편쯤은 쓱싹 써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흘 걸려 단편소설 한 편을 쓴 다음에 의식을 일단 제로 상태로 털어버리고 새로운 태세를 갖춰 다시 사흘 걸려 다음 단편소설을 한 편 쓴다. 라는 식의 사이클은 길게 반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짤막짤막하게 끊기는 작업을 계속하다가는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의 몸이 우선 당해내지 못합니다. 단편소설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도 직업 작가로서 먹고사는 이상, 흐름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야 합니다. 긴 세월 동안 창작 활동을 이어가려면 장편소설 작가든 든편소설 작가든 지속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해줄 만한 지속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지속력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거기에 대한 내 다답은 단 한 가지, 아주 심플합니다-기초 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 

 

"....또한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얘기지만) 그에 따라 사고 능력도 미묘하게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고의 민첩성, 정신적 유연성도 서서히 상실됩니다. 나는 어느 젊은 작가와 인터뷰 할 때,"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에요"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좀 극단적인 말이었고 예외도 물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물리적인 군살이든, 메타포로서의 군살이든. 많은 작가들이 그런 자연스러운 쇠퇴를 문장 기법의 향상이나 성숙한 의식 같은 것으로 보완하지만 거기에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13

"...그리고 그 강고한 의지를 장기간에 걸쳐 지속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가 문제가 됩니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경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늦건 빠르건 반드시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보복(혹은 반동)을 받게 됩니다. 한쪽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필연적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 일이든 공부이든 모든건 정신이 하는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육체가 타자기를 두두리고 생각을 하고 기술을 익힌다. 최근에 운동을 다시 시작했는데,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과 집중력을 다시금 회복한것 같다. 점심시간에 간단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신하고 런닝머신에서 달리고 온다. 무중력 상태로 온것 같은 '러너스 하이'를 경험하기 가장 좋은건 러닝이다. 운동이 육체를 건강하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길인것 같다. 운동과 집중력에 상관 관계가 크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큰 '유대감'같은 것이 형성 되었다.건강한 몸으로 더 나은 작업물을 만들거라는 '믿음'도 함께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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