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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도 습관이 된다

늦게 알아도 될 현실이 있고, 철없어야 할 시기도 있다

by 심야서점

초등학교 몇 학년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지 않지만, 한 장면만은 생생하게 그려진다.

반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아파트란 곳을 처음 가봤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최근까지도 친구는 그곳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취업하고 결혼한 이후에는 독립했겠을 테고, 지금은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있겠지. 새삼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느낌이 든다.)


아파트란 곳을 처음 접한 충격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많은 것을 처음 보았다.

당시에는 이름을 알지 못했던 과일, 영어만 잔뜩 적힌 병에 담긴 과일 주스, 역시 외국에서 사 온 듯한 간식, 처음 보는 장난감들이 친구가 자기 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그것들이 먼저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여기서 놀란 것도 많았지만 딱 한 장면,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친구가 문제의 과학 상자를 꺼냈을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서 항상 슬로로 재생이 된다. 다른 것들도 자랑할 것이 많았겠지만, 그 친구에게는 그 당시 과학 상자가 가장 큰 자랑거리였던 거겠지. 나의 동경하는 눈을 즐기듯이 하나씩 조작을 해보며, 내겐 쉽게 만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심을 쓰듯이 “너도 한번 해볼래”라는 질문을 들었을 땐, 저녁 식사시간이 가까워질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친구 엄마는 저녁식사를 먹고 가라고 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점의 기분,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정확히 나진 않지만 친구의 별 다른 뜻 없는 행동과 말에 아마도 마음이 상했으리라.

상한 기분이 남아있진 않지만, 확실히 기억하는 건 그때가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첫 번째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첫 번째 순간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장난감을 갖고 싶고, 그것을 어린이날과 같은 특별한 때 선물로 받은 적은 있었으나, 그건 달랐다. 왠지 그땐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과학 상자가 친구네 집의 부를 대표하는 것 같았다.


그 시점에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나의 한계를 지어버렸다. 난 갖지 못한다고...


물론,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면 사주실 지도 몰랐다.

무리를 해가면서 사주실 수도 있었겠지만, 난 내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가난까진 아니더라도 차이는 명확했다.


이후에도 그런 상황이 종종 있었다.

내게 주어진 환경 하에 무리스러운 희망은 스스로 한계를 짓고 포기를 했다. 그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현명하다고도 위안을 삼았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는 무리인 거야, 그걸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중년이 되니 난 너무나도 쉽게 포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물론, 시작은 현실적인 상황에 철없는 아이의 적절한 판단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때로는 철없이 무책임하게 요구했다면 어땠을까 반추해보기도 한다.


난 사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정해진 틀 속에서 꿈을 꾸기도 전에 한계에 벗어날 것은 미리 포기를 하다 보니, 그것이 익숙해져 버렸다.

때로는 일탈도 해보고, 때로는 고집도 피워보고,

때로는 엇나갔다면 오히려 인생은 다른 쪽으로 풀리지 않았을까?

오히려 현실을 모르고 떼쓰는 철없던 시절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오해할 사람이 있을까 봐, 그렇다고 하여 내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건 아니었다.

여유롭지 않음과 불행은 서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가지가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핍을 모르면,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도, 가진 것에 대한 감사도, 절약도 배우지 못하게 된다.


난 어린 시절에 결핍을 배웠을 뿐, 불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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