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가 남긴 여운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예상하지 못한 세계로 미끄러졌던 기억, 그리고 『삼체 X』

by 심야서점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보았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며

강한 충격을 남겼던 영화가 몇 편 있습니다.

제게는 두 편이 그렇습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그리고 「매트릭스」입니다.

단순한 탈주극이자 범죄 영화라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갑자기 뱀파이어의 세계로 넘어가던 그 순간.

한참 졸릴 시간대의 심야 영화였는데,

오히려 그날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또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매트릭스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SF 세계로 진입하던 그 전환은

지금도 제가 꼽는 ‘가장 재미있었던 영화’ 다섯 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삼체』를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범죄 스릴러나 음모물처럼 시작했던 이야기가

어느새 원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로 확장됩니다.

읽는 내내 “이 이야기가 여기까지 갈 줄은 몰랐다”는 감정이

계속해서 따라붙었던 기억이 납니다.


『삼체』의 마지막에서 태양계 문명은 결국 멸망하지만,

그럼에도 인류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여운이 꽤 오래 남았고,

책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그 세계를 곱씹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읽은 지 시간이 꽤 흘러

이제는 등장인물이나 세부 줄거리가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삼체 X』가 북펀딩을 통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큰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그 선택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삼체’라는 작품에 대한 믿음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원작자인 류츠신이 아닙니다.

바오수라는 작가가 삼체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공식 팬픽션에 가깝습니다.


류츠신의 허가를 받아 출간된 작품이기에

세계관은 분명히 삼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삼체 X』는

삼체 마지막 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윈톈밍과 AA의 이후를 다룹니다.


태양계의 멸망을 막기 위한 메시지는 전송되었지만

결국 멸망은 피하지 못했고,

그들은 새로운 항성계의 한 행성에서 삶을 이어갑니다.


이후 윈톈밍과 AA는

삼체 세계의 지자와 함께

우주의 주재자를 돕고, 매복자를 경계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야기는 원작 이후의 세계를

네 개의 파트로 나누어 이어갑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원작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혀 다른 작품을 읽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대화 위주의 전개가 잦아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응집되기보다는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물리학적 개념들이 설명 없이 전제된 상태로 등장해

읽는 내내 쉽게 따라가기도 어려웠습니다.


혹시 원작을 다시 한 번 읽고

다시 『삼체 X』를 읽으면 달라질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크게 달라질 것 같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완전히 의미 없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삼체』를 읽고 난 뒤 남았던 강한 여운을

어딘가에 내려놓고 싶을 때라면,

하나의 선택지는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적어도 『삼체 0: 구상섬』보다는

원작의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고,

삼체 세계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역할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삼체가 남긴 질문과 감정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라면,

『삼체 X』는 그런 마음을 잠시 머물게 해주는

하나의 경유지 정도로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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