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대학교를 다니며 캠퍼스 생활을 즐기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자퇴를 하고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불안했다.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뭐든 해보자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경험해보면 뭔가 보일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는 것이라면 다 해보기로 했다.
20여 개의 아르바이트와 영업, 납품, 판매, 생산 등등의 다양한 직업군의 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힘들었던 순간도 많았지만 그만큼 재밌었던 순간도 많았는데 해본 일 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일을 꼽으라면 과일가게에서 일했던 때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과일가게라... 재밌겠는데?
'이번엔 어떤 일을 해볼까?'하고 고민하던 찰나에 과일가게 직원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 됐다. 처음엔 조금 망설였지만 고민 끝에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예전부터 서비스업에 관심이 많아 장사를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때가 젊은 총각들이 과일을 파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때라 나도용기를 낼 수 있었다.
과일가게로 출근하던 첫 째날
"어서오세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동네 형님 같은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은 인사만큼은 크게 할 것을 강조했는데 아직 적응도 안됐는데 목소리가 크게 나올 리 없었다. 목소리를 크게 낼수록 나 자신이 어색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오가는 손님들에게 큰소리로 인사했고 눈과 손을 바삐 움직이며 일을 배워나갔다.
과일 파는 게 뭐 별 거 있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배울 게 많았다. 과일을 포장하고 진열하는 방법부터 구매를 유도하는 자리배치까지 고객의 지갑을 열기 위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격표에 글자를 예쁘게 적는 방법과 과일을 소개하는 문구까지 세세하게 배웠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조금씩 일에 재미가 붙었다.
생각보다 재밌네, 이거.
재밌었다. 일이 재밌었냐고? 아니다. 내가 과일가게에서 일하며 느낀 재미는 일이 아니라 손님과의 대화였다. 평소 얘기하는 걸 좋아해 낯선 사람과도 대화를 서슴없이 나누는 편인데 나의 이런 습성은 일 하는 데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여성적인 성격이라 여성분과 대화를 잘 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님들과 얘기가 잘통한다. 그게 나의 매력이라면 매력이라 하겠다.
처음엔 손님들과 형식적인 인사만 나눴지만 어느 정도 얼굴이 익고나서부터는 농담도 하며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말장난을 하며 서로 웃기도 하고 가끔은 손님의 신용카드를 마술로 없애며 웃음을 주기도 했다. 항상 "이모, 이모"하며 친근감있게 다가갔고 나를 찾는 손님들도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때로는 과일과 야채에 대한 이야기 말고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기도 하며 '쓸데있는' 잡담을 이어나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먹거리를 사기 위함을 넘어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서 들르던 손님들도 제법 있었던 것 같다.
외국인 손님은 나의 전담마크
내가 일한 과일가게에는 유난히 외국 손님이 많았는데 한 때 영어스터디를 통해 익힌 회화실력 덕분에 외국 손님에게도 어줍짢은 영어를 하며 과일을 판매할 수 있었다. 영어라고 해봤자 사실 유창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외국인 손님들이 올 때면 언제나 내가 전담마크해서 과일을 팔곤 했다. 그 덕분에 같이 일하던 형님이 외국인 손님에 대한 두려움을 버렸다나 뭐라나 ㅎㅎ
평소에 날보며 되게 싹싹한 청년이라고 좋아하시던 손님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와 이 총각은 영어도 잘하고, 완벽하네 완벽해!"
영어를 배워두기 참 잘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단골손님 중에는 일본인 새댁들도 몇 있었는데 내가 미리 외워둔 일본어 문장으로 말을 걸 때마다 항상 빵 터져서 깔깔 웃곤 했다. 얼떨결에 나는 3개국어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렇게 과일뿐만 아니라 웃음도 함께 팔았다. 이렇게 사람들과 얘기나누고 웃고 떠드는 것이 내가 과일가게에서 느낀 가장 큰 재미였다.
바쁠 땐 밥도 굶어가며 하루 종일 배달만 하기도
처음 몇 달은 일이 아니라 놀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재밌었지만 하면 할수록 힘든 순간도 많았다.
특히 한여름철에 하는 배달이 그랬다.
과일 성수기인 여름에는 손님이 많은 만큼 배달도 많다. 쌓여있는 장바구니를 배달하기도 바쁜데 수박이나 복숭아 박스까지 같이 배달해야 할 때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떤 날은 주문이 너무 많아 하루 종일 배달만 한 적도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12시간을 밥도 못 먹어가며 꼬박 배달만 했는데 그날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파트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는 그대로 퍼질러 앉아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배달도 배달이지만 여름철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일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비 오는 날에 비하면 차라리 나았다.
태풍이 불던 날, 과일바구니를 집어던진 사연
비 오는 날 하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태풍이 심하게 몰아치던 날 조용하던 가게 전화기가 갑자기 울렸다. 과일주문 전화였다.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라 걸어서 배달을 갔는데 태풍이 부는 이런 날에 무슨 배달을 다 시키는 건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그러다 홧김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길 한복판에다가 내동댕이쳤다. 너무 열이 받아 욕을 하며 한참을 씩씩거렸다. 길바닥에 널브러진 과일들을 발로 다 밟아버리고 심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 아닌데 그땐 너무 신경질이 났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별 수 없이 땅에 떨어진 과일들을 다시 바구니에 담고는 배달을 갔는데 열받아서 씩씩거리는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몸보다 힘든 건 마음이었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 때였다. 비 오는 날 머리에서 빗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내 모습을 엘리베이터 거울 속으로 바라볼 때 내가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또 허름한 등산복 차림에 땀범벅이 된 채로 일을 하다가 가게 옆에 있는 식당에서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점심을 먹고 있는 샐러리맨과 눈이 마주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일을 팔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때의 그 심정은 몸이 힘든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이놈의 사람 스트레스!!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을 상대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했다. 몸이 피곤하다보니 그냥 손님 자체가 스트레스인 경우도 있었지만 유독 나를 스트레스 받게 만드는 손님의 '말'이 있었다.
"좋은 걸로 주세요."
일하면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이유는 이러하다. 만약 사과를 달라고 할 때 여러 바구니 중에서 한 바구니를 선택해서 담으려고 하면 그때 손님이 옆에 있는 다른 걸로 달라고 말한다. 아마도 파는 사람이 골라주는 과일은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다음 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손님에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달라고 얘기한다. 그러면 그냥 아무거나 달라고 얘기한다. 손님 말대로 내가 아무거나 골라서 담으려 하면 이번엔 이렇게 말한다.
"그거 말고, 옆에 있는 게 더 좋아보이네. 옆에 있는 걸로 줘요."
우쒸, 순간 짜증이 확 난다.ㅋㅋ 물론 손님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과일 살 때도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서 보면 그런 똑같은 상황을 매일같이 겪게 되다보니 별 것 아닌 걸 알면서도 짜증이 나는 거다. 손님에게는 한 번이지만 나에게는 수십 번, 수백 번이 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이게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같이 일하던 형에게 이 얘기를 하니 그 형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ㅋㅋㅋ"
잉? 과일가게에서 일한다고?
내가 과일가게에서 일을 한다고 말했을 때 지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웬 과일가게냐는 것이었다. 처음엔 말하기가 부끄러웠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힘든 일을 내가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과일가게 일이 보기보다 보통 일이 아니다. 되게 힘들기 때문에 얼마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자기 장사 할 생각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몇 달 버티지를 못한다. 그 정도로 힘들다. 몸도 힘들고 정신도 만만치 않다.
그런 일을 나는 해내는 걸 넘어서서 재미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뿌듯함을 느꼈다. 그 이후로는 어딜 가서도 내 직업을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더 오버하면서 당당하게 얘기하고 다니곤 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 내 과일가게에서 일한다.
과일뿐만 아니고 두부도 팔고 콩나물도 팔고 다 판다. 장난아니제?"
과일가게에서 일한 후 장사에 대한 막연한 꿈을 정리하다
그동안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내가 서비스업과 잘 맞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내 장사를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항상 장사를 꿈꿨다. 하지만 막상 과일가게에서 일을 해보고 또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을 가까이서 보니 장사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장사를 하면 잘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손님 응대만큼은 자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건 사업에서 중요한 여러 요소 중 겨우 하나일 뿐이었다.
과일가게 일을 통해 지금까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장사를 꿈꿨던 그 막연한 생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계속 생각만 하는 것보단 일단 한 번 해보면 어떻게든 답이 내려진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해보길 잘했어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기 힘들어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여행, 사랑 등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는 일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해보고 싶은 관심가는 일이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도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내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장사를 일찍 배워 봤다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그때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이런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