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 친구가 며칠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야 모습을 나타냈고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했는데 조금 과하게 했던 탓인지 휴대폰 요금이 100만 원이 청구됐다고 했다.(지금과 달리 폴더폰을 쓰던 그 시절에는 인터넷 이용 요금이 상당히 비쌌다.)
부모님께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동안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웃기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때가 막노동이라는 것에 대해, 그러니까 막노동을 하려면 어디에 가면 되는지 일당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내가 막노동판을 전전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20대 시절의 나는 또래들에 비해 다양한 업종에서 일을 해봤다. 내가 했던 일들을 다 열거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우와, 별 걸 다해봤네."라고 말할 정도로 별의별 일을 다했다.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나는 뭐든 해보면 그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또 많은 경험을 쌓다보면 그만큼 내가 단단해져 다른 어떤 힘든 일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막노동도 그런 이유에서 하게 된 것이었다.
매일 새벽 일찍 인력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 앞에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을 구하기 위해 담배를 한 대씩 물며 줄지어 서 있었다. 대부분 40~50대 아저씨들이었다. 그 사이에 20대의 새파란 젊은이가 있으니 날보고 '뭐하는 놈인가?' 싶어 훑어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타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는 키가 작고 마른 체구였던 터라 처음엔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소장님과 얼굴을 어느 정도 익히고나서부터는 고정으로 일을 얻을 수 있었다.
인부를 구하기 위한 차량들이 하나, 둘씩 도착했다. 차에 올라타서는 한참을 이동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려고 할 때쯤이면 어느새 일터에 도착해있었다.
여러 일터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
며칠 동안 같은 곳에서 일할 때도 있었고 매일매일 다른 일터에서 일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달랐는데 인력사무소를 다니면서 공사장, 스티로폼 정리 및 분류, 휴롬 착즙기 조립, 철강회사, 고속도로 건설 현장 등등 여러 곳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많이 갔던 곳은 공사장이었다. 공사장으로 갈 때마다 걱정이 되었다. 몸이 힘들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막일을 해본 적이 없다보니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심적으로 부담이 컸다.
막노동과는 거리가 먼, 완전 초짜배기였던 나는 가는 곳마다 욕을 들어 먹기 일쑤였다. 기본적인 자재 이름도 몰랐고 어떤 순서로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하는 지도 몰랐다. 어떤 날은 일을 시작해서 마치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욕만 먹다가 끝난 적도 있었다. 얼마나 호통을 치는지 그날 받은 돈은 일당이 아니라 욕값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늘 하나 없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
공사장은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비하면 차라리 나았다. 고속도로를 닦는 현장에 가보면 그늘이 하나도 없다. 한여름에는 그야말로 불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더위를 견디는 것이 문제였다. 한 마디로 더위와의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석면을 만지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한 번은 석면 만지는 작업을 한 적 있었는데 처음엔 그게 석면인 줄도 몰랐다. 석면이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일했다. 일하는 중간에 몸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 퇴근할 때쯤 되니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피부과에 들러 약을 지어먹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됐지만 정말 암울했던 건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은 석면 공장에 투입됐다는 것이었다. 같이 일을 하러 갔던 아저씨 중에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공장 사장과 싸우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나도 따라 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왕 일찍 일어나서 왔으니 일은 하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시작했다. 결국 그날 밤 가려움이 더 심해져 한숨도 자지 못했다. 2일 동안 일해서 받은 일당의 기쁨보다 가려움 때문에 잠을 설치는 괴로움이 더 컸다. 다음 날 소장님에게 다른 곳으로 바꿔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막사에서 2주 동안
먹고 자며 막일을 했다
막노동하면 2주 동안 막사에서 합숙을 하며 일하던 때가 가장 많이 생각난다. 오래 전부터 막노동을 해오던 아는 형이 윗지방에 있는 건설 현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며 나보고 같이 올라가서 일하자고 말했다. 고민을 하다가 결국 같이 가기로 했다.
짐을 바리바리 싼 후 나의 집인 경상도를 떠나 버스를 타고 충청도의 어느 한 건설 현장으로 갔다. 학교를 짓는 곳이었는데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허허벌판이었다. 일만 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곳의 업무량은 상당했다. 아침 7시쯤 시작해 오후 5시쯤 되면 마치는 보통의 건설 현장과 달리 아침 6시쯤 일을 시작해 늦게 끝나면 밤 9시가 다 돼서야 일을 마치곤 했다. 일은 시키는 반장의 호통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종일 일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은 하다보니 할만했는데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잠을 자는 막사였다. 이불과 베개가 누런 건 기본이었고 이불위에 모래가 많아 이불을 덮을 때마다 얼굴 위로 모래가 떨어졌다.
20명이 넘는 사람들과 함께 따닥따닥 붙어서 잠을 자야하다보니 편하게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마음대로 불을 켜고 끌 수도 없었다. 또 안은 왜 그렇게 습한지 잠을 자는 내내 온몸이 눅눅해져있었다. 씻는 곳도 열악했고 마음 편하게 씻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지금 다시 그곳에서 자라고 하면 못 자겠지만 그때는 희한하게 잘잤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일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해서 그런지 누으면 언제나 바로 골아떨어지곤 했다. 사람이 상황이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적응을 하는 것 같다.
몰래 훔쳐먹었던 과자가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꿉꿉한 막사에서 합숙하며 막노동을 하던 그때가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과자'때문이었다.
막사 안에는 옛날 과자인 쌀강정을 밤마다 꺼내먹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한 두 봉지가 아니었다. 한 포대였다. 사람 한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포대였다. 그 안에 쌀강정이 가득 들어있었다.
매일 밤마다 그 사람이 쌀강정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곤 했는데 평소에 먹지도 않던 옛날 과자가 그때는 왜 그렇게 맛있게 보이던지. 친한 사이가 아니라 하나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하던 중간에 가지고 올 게 있어 막사에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쌀강정이 생각났다. 막사 안에는 나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쌀강정이 담긴 비닐포대를 몰래 꺼내 묶인 매듭을 풀었다. 풀자마자 쌀강정의 달달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코로 과자의 향을 음미한 후 과자 하나를 집어들어서는 입안으로 쏙 넣었다. 과자가 혀에 닿는 순간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매일 그렇게 일하는 중간에 몰래 막사에 들어가 쌀강정을 먹으며 남몰래 과자를 먹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였다. 얼마나 맛있던지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닌 빈곤 속에서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아는 형과 2주 동안 원정 노가다를 떠나기도 했고 그 형네 집에서 먹고자며 2달 정도 함께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직을 하는 중간중간에 막노동을 하기도 했는데 일을 그만 두고 새 직장을 구할 때 마냥 놀고 있는 게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하루 일하면 단 돈 몇 만 원이라도 벌 수 있으니 놀 바에는 차라리 막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며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라도 하려는 나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특히 대견스러워 했고 나 스스로도 내가 기특했다.
막노동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에 불과했지만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여러 직종의 일을 해볼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막노동을 하고 난 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어떤 일이든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이 늘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뭐든 하려고 하는 나 자신에게 대견함을 넘어 대단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그런 삶의 자세는 지금의 내가 어떤 도전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딪칠 수 있도록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누군가는 막노동이 밑바닥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막노동을 통해서 배우려 했다.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