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기웹툰인 ‘미생’을 처음 보게 된 건 작년 가을쯤이었다.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만화책 미생이 서재에 꽂혀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미생의 인기를 전부터 익히 들어왔었던 나는 인기의 비결이 궁금이 책을 펼쳐보았다. 미생은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던 주인공 장그래가 프로입단에 실패한 후 회사생활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만화이다. 웹툰 작가 윤태호 님의 작품인 미생은 드라마로 재탄생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직장인의 애환을 가감 없이 그려낸 모습에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인기와 공감을 얻었다. 미생이 이토록 인기가 많은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아마 독자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주옥같은 명대사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초가 없으면 계단을 오를 수 없다.
골을 넣으려면 일단 공을 차야 한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
인생은 끝없는 반복!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명대사들이 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명대사를 올려놓은 웹사이트가 제법 많이 나올 정도로 미생의 명대사는 유명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적잖은 울림을 주었는데 특히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공감했다. 나 역시도 공감되는 명대사들이 많았다.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삶의 진리를 어쩜 이렇게 예리하게 잘 표현했을까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작가의 직관이 놀라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만화를 보면 볼수록 뭔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냉혹한 현실을 그린 만화이다 보니 만화의 분위기 자체가 엄숙한 것도 있었지만 마음을 울리는 명대사가 많은 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명대사들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취직해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고 문을
하나 연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명대사에 많은 직장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사회는 분명 냉혹하고 치열한 곳이다. 도태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한다. 경쟁에서 싸워 이겨야 한다. 내 밥그릇을 챙기려면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직장 생활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만 말할 뿐이다. 성과가 없으면 지난 노력들은 큰 의미가 없다. 이처럼 현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회사가 전쟁터라는 말도, 밖은 지옥이라는 말도, 가뜩이나 힘든 세상을 더 무섭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회를 냉혹한 곳으로 느끼게 만들어 사람을 더 경직시키는 것만 같았다. 전쟁터같은 세상이 두려워 도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조차 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런 점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살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누구나 가까운 사람에게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상대방도 비슷한 힘든 일이 있었다며 자신의 말에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위로해주길 바라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듣고 싶은 말은 "괜찮아. 그 정도면 잘한 거야.", "실수할 수도 있지 뭐. 다음에 잘하면 돼." 라는 식의 긍정의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별 것 아니라고, 하면 다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며 힘을 실어주는 것이 마음을 더 가볍게 만들어줄 때가 많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가 전쟁터니 지옥이니 하는 말보다는 해보면 별 것 아니라고, 눈 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고 해도 나를 품어주는 따뜻한 사람들도 많다고 그렇게 말해주면 사람들이 더 용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취직한 것이 성공이 아니라 겨우 문을 하나 열었을 뿐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취직한 것이 겨우 문 하나를 연 행동이라는 식으로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닫혀 있던 문 하나를 연 것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취직뿐만 아니라 합격, 승진, 결혼과 같은 저마다의 크고 작은 문 하나하나를 여는 것 모두가 다 성공이다.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산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닫힌 문 앞에서 한탄하기보다는 하나씩 열어나가며 전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이다. 그렇게 작은 것에서도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야 삶의 무게가 조금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피식~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도 못해가지고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지난 20대 때 여러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종종 들었던 말이다. 내가 힘들어하거나 일을 제대로 못 해낼 때 이런 말을 듣곤 했다.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나는 잘 살고 있다. 살아보니 세상이 그리 험난한 것 같지도 않다. 막 그렇게 따뜻한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뭐 수시로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냐는 말이 세상을 먼저 겪어본 인생 선배의 입장에서 걱정 반, 꾸짖음 반으로 말해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잘 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식으로 좀 더 따뜻하게 격려를 해줬다면 20대의 내가 덜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어디까지나 치열하게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아무 것도 안 하면서 격려받기만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호된 혼꾸멍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듯 쉬운 직장 생활도 없다. 업무는 늘 고되고 상사의 호통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열심히 일하는 것에 비해 월급은 쥐꼬리만 하고 제대로 휴식할 시간조차 부족하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힘든 것만 생각하면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처럼 느껴지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소소한 재미와 즐거움, 성취감을 발견해가며 산다면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짊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럴 때 우리 사회가 전쟁터가 아닌 놀이터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때가 오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내는 삶이 아닌 그냥저냥 살아가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좀 더 가볍게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
직장인들을 비롯하여 소상공인, 전업주부, 프리랜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계신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