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에 과일가게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가게사장님은 매일 아침 농산물시장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사오는데 한번은 양배추 10망을, 개수로는 30개를 사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겉에 있는 잔껍질을 까고 보니 속에 있는 양배추가 둥글둥글하니 모양이 예뻤다. 선명한 초록빛이 양배추를 더욱 신선하게 보이게 했다. 하나씩 랩으로 싼 후 바구니에 담았다.
말끔하고 신선해보이는 양배추들 중에서는 속이 갈라진 못생긴 양배추도 서너개 있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양배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속이 많이 갈라져 팔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공짜로 주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일단은 거저주는 가격으로 저렴하게 팔아보기로 했다.
속이 갈라진 양배추를 다른 박스에 따로 옮겨 담았다. 그때 팔던 양배추가 3,000원 정도 했으니 못생긴 양배추는 단돈 500원에 팔기로 했다. 가격표에 양배추 500원이라고 단순하게 적기보다는 뭔가 색다르게 적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이렇게 적었다.
못생긴 아이들 ㅠ.ㅠ 500원
예상대로 못생긴 아이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색이 예쁘고 모양도 반듯한 양배추만 사갈 뿐 이 못생긴 양배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짜로 줘도 받지 않을 정도로 속이 많이 갈라져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팔고 싶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천대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생긴 게 못났다고 해서 맛이 없는 것도 아닌데 겉보기에 볼품없다는 이유로 손님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못생긴 양배추들이 불쌍해보였다. 손님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예쁘게 생긴 물건을 고르는 게 당연하지만 이것이 외모를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우리의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팔지? 하고 생각하던 중 '못생긴 아이들ㅠ.ㅠ'이라고 써놓은 글자에 눈이 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못생기게 태어난 게 자기 죄도 아닌데 죄송하다고 사과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보였다. 더군다나 거저주는 정도의 몸값을 적어놨는데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양배추 입장에서도 많이 서운할 것 같았다. 뭐라고 바꿔 적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인물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 정도 값어치는 하자. 500원
영화 베테랑을 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엇을 패러디 한 것인지 알 것이다. 그렇다. 배우 황정민이 했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대사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렇게 적고 나니 뭔가 만족스러웠다. 생긴 건 못생겼어도 싱싱함만은 남부럽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이 못생긴 양배추들은 한 아주머니에게 다 팔려나갈 수 있었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양채추는 아주머니의 손에 들린 채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멀어져가는 양배추를 보며 다음 생에는 꼭 예쁘고 속이 꽉 찬 양배추로 다시 태어나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