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속에 스며있었던 엄마의 남모를 고생

by 기타치는 권작가

길거리 양말장사, 노상 햄버거 장사, 식당, 파출부, 마트, 애기돌보미 등등.


내가 한 일이 아니다. 우리 엄마가 한 일이다. 최근까지 해본 일까지 더하면 학원청소, 페인트 칠, 과일따는 일, 공장 생산직 등등 일의 종류가 더 많지만 처음에 나열한 저 일들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 집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엄마가 가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공장에서 떼온 양말을 길거리에서 돗자리를 펴놓고 팔았다. 자신만의 레시피대로 만든 미니 햄버거를 노상에서 리어카 위에 놓고 팔기도 했다. 마트 캐셔와 식당 서빙도 했고 파출부를 나가 남의 집에서 청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정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무려 10년 넘게 했다. 한두 명의 아이를 고정으로 돌봤고 가끔 시간제로 맡기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다리가(?) 잘못 걸리면 한 번에 6명의 아이를 돌봐야했던 때도 있었다.



붕어빵 파는 아줌마

여러 일 중에서 특히나 기억에 남는 일은 따로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 못 보던 붕어빵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붕어빵을 파는 곳 앞에는 사람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을 사먹기 위해 손에 천 원짜리 지폐를 쥔 채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붕어빵 굽는 냄새가 얼마나 고소하던지 나도 하나 사먹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붕어빵을 굽고 있는 아주머니가 왠지 낯이 익어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설마했는데 역시나였다. 우리 엄마였다.


"엄마!"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빵을 굽고 있던 엄마는 나를 보더니 멋쩍은 듯 살짝 웃더니 다시 빵을 굽는 데 집중했다. '웬 붕어빵 장사래?' 하는 생각에 호기심도 일었지만 어린 나이였기에 조금 부끄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항상 붕어빵을 팔고 있는 엄마에게 들러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붕어빵을 하나 집어 들고는 집으로 가곤 했다. 하교길뿐만 아니라 학원을 오갈 때도 지하철 환승역마냥 엄마에게 들러 잠깐 얘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잠깐 들러 용돈을 받거나 붕어빵을 집어먹을 줄만 알았지, 엄마가 하는 일을 도와줄 줄은 몰랐다.



엄마의 고생을 몰랐던 철없던 나

엄마는 많은 일을 해봤지만 특히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종일 서서 빵을 구워야 하다보니 다리가 아팠고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다보니 팔목 통증을 자주 호소하기도 했다. 날씨가 쌀쌀한 저녁이 되면 추위와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한 겨울에는 아무리 많이 싸매고 껴입어도 견뎌내는 게 만만치 않아보였다.

그런 것쯤은 엄마도 괜찮다고 말했다. 엄마가 힘들어했던 건 붕어빵 리어카를 아파트 주차장까지 끌고 가는 일이었다. 장사하는 곳 근처에는 리어카를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가까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리어카를 묶어놓은 채 보관을 했었는데 주차장까지 가는 거리가 약 150m나 되었다. 길이 평지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약간 경사가 져서 여자 혼자서 150m 거리를 리어카를 밀고 간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리어카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일이라도 엄마를 도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땐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가 힘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친구들과 일탈을 일삼으며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겪어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밤 늦게까지 놀다가도 엄마한테는 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가곤 했다. 엄마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던 것도 같다. 매일 11시가 넘어야 귀가를 했던 엄마는 티브이를 보며 편하게 누워있는 나를 보며 씩씩거리며 말했다.


"니는 엄마한테 와서 리어카 끌어줄 생각은 안 하고 뭐하고 있노? 엄마 고생하는 거 안 보이나? 진짜 너무하네."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나는 미안하기는커녕 도리어 짜증만 더 났다. 그 정도로 나는 엄마의 고생을 모르는 철없는 아들이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조금 불량한(?) 청소년이었던 누나도 엄마를 도와줄 줄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다. 맨날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오던 아빠에게 엄마의 고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엄마, 아빠의 다툼은 잦았고 집이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런 힘든 시간속에서도 엄마는 가족을 위해 팔목을 주물러가며,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붕어빵을 팔고 또 팔았다. 눈물은 사치였다. 그럴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했던 엄마. 미처 여기에 다 싣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엄마의 삶은 웬만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하지 못했다. 비행청소년이었던 아들과 딸의 일탈,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던 아빠,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통장잔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삶이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물이 다 말라버릴 정도의 어려움속에서도 누나와 나를 키우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던 엄마.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저려온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붕어빵 장사를 오래해서 그런지 지금도 가끔 팔이 안 좋다고 말한다. 장사를 할 때 내가 리어카를 안 끌어다줘서 더 그런 건 아닌지 괜스레 미안할 때가 많다. '그때 잘할걸, 엄마를 많이 도와줄걸'하는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지금이라도 잘해드리려고 한다.


지금 우리 가족은 누구보다도 화목하다. 누나는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나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어 진로 걱정을 덜었다. 아빠는 아직 술은 드시지만 엄마와 오순도순 얘기나누며 적당히 술과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하고 십 원 짜리 하나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모아왔기에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게 아닌가 싶다.


엄마 나이도 이제 60이다. 점점 야위어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엄마도 나이를 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제는 엄마가 힘든 일 하지 말고 남은 인생 잘 즐겼으면 좋겠다. 늙더라도 천천히 늙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릴 때 못했던 효도 이제부터라도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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