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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Nov 12. 2019

대출 받아 떠난 제주도 여행

20년 넘게 살던 곳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하던 일을 그만뒀다. 한 달 동안 짐 정리를 하며 쉬었다. 그 전에 정신없이 일만 하며 살다보니 그때의 휴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때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여행이나 한 번 떠나볼까?'


그때의 내 나이 26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행이라는 단어는 내게 생소했다. 나의 의지로 혼자서 어딜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는 만큼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내게는 여행이었다.


빚내서 떠난 제주여행

어디로 떠날지 고민했다. 처음 해보는 여행이라 가까운 곳부터 가보기로 했다. 여행을 결심하긴 했지만 그 당시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용기도 부족했다. 돈이 적게 들면서 큰 용기 없이도 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여행을 혼자서 3번이나 더 가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돈부터 구해야했다. 부모님에게 빌리기는 싫었다. 내가 결정한 여행인 만큼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카드대출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대출이었다. 30만 원 정도 대출했던 것 같다. 그 정도 돈이야 금방 갚으면 될 거라 생각하고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후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제주도에 도착하고 보니 같은 한국땅인데도 마치 해외여행지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공기부터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만큼 처음이라는 여행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예약한 렌터카를 받고 신나는 노래를 틀은 후 본격적으로 제주도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유명한 관광지를 검색해서 즉흥적으로 쏘다녔다.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한라산 등 좋았던 제주도 관광지도 많았지만 내가 느낀 제주도의 매력은 게스트하우스였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추억

성산에 있는 S게스트하우스는 첫 제주여행에서 처음으로 머물렀던 숙소이다. 바닷가 바로 앞에 있어 경치가 좋았다. 저녁 파티 때 제주 흑돼지를 맛볼 수 있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 맛이 잊히지 않는다. 2차로는 게하에 달린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서 맥주와 막걸리를 마셨는데 밤바다를 보며 마시는 맥주맛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밤새도록 술마시고 놀기로 유명한 게하가 있었으니 바로 함덕에 있는 A게스트하우스였다. 제대로 먹고 마시며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갔던 게하였지만 정말로 잠을 안 자고 밤새 마시고 놀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시끄러워서 결국 새벽에 렌터카 안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해장술을 하자며 또 술상을 차려서는 이것저것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그곳에서 마시는 술에는 뭔가 낭만이 담겨있었다. 특히 비 오는 날에 바닷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술을 마실 때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A게하에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마침 그날이 내 생일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내 생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얘기하게 됐는데 같은 테이블에 있던 어 누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왔는데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고 그 안에는 초코파이 두 상자가 담겨 있었다. 뭔가 했는데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케이크 대신 초코파이를 사왔던 것이다. 깜짝 놀랐다. 완전 감동이었다.


초코파이를 쌓은 후 초를 꽂아야 하는데 초가 없어 급한 대로 제사할 때 쓰는 향을 꽂고는 사람들과 다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생일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 누나에게도 고마웠다. 여행의 가장 큰 재미는 역시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제주도는 혼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파티 때마다 처음엔 다들 서먹서먹해 하다가도 술이 한 잔씩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친구가 되고 형, 동생 먹곤 했다. 다음 날 아침 술을 깨고 나면 처음 보는 사람마냥 데면데면해하며 이내 자기 갈 길을 가곤 했지만 가끔은 친해진 사람들과 함께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게스트하우스가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마음도 잘 안 맞고 대화코드도 달랐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많았다. 재미가 없어 대충 놀다가 일찍 들어가서 잠을 청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아쉽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세상만사 모든지 다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인데.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여행을 하다보면 멋진 이성과의 우연한 만남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화 속에서 봤던 스토리가 혹시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낭만을 꿈꾸곤 한다. 사실 나 역시도 그런 영화와 같은 로맨스를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었다.


S게하에서 심쿵했던 사소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놀 때 같은 테이블에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함께 웃으며 놀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여성이 이제 자야겠다며 먼저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쉬운 마음이 솟구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나 그 여성을 따라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어, 그러니까 음..

나중에 식사 한 끼 하고 싶은데 전화번호 좀 주세요."


잠시 멈칫하더니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오해는 마시라. 지금까지 한 번도 길거리에서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어본 적도, 번호를 달라고 해본 적도 없는 나이다. 그녀에게 번호를 달라고 했던 이유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르고 키가 작았던 데다가 얼굴도 평범했던 나는 평소 자신감이 없었다. 좋아하는 여성이 있어도 다가가지 못하고 매번 속앓이만 했는데 그런 나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이번엔 차일 때 차이더라도 말이라도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다가갔던 것이다.

 

며칠 뒤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내가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연인으로 발전하진 못했다. 여러 사정과 상황이 있었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 그것밖에 안 되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아쉬웠던 짧은 만남은 추억으로 남아 가끔씩 생각이 나곤 한다.


2박 3일 일정으로 떠났던 첫 제주여행 때 마지막 날 집에 가기가 아쉬웠다.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결국 추가로 대출을 받았다. 20만 원 정도? 굳이 대출하면서까지 여행을 할 필요가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여행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어릴 때 나는 무모했다. 무모함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많은 곳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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