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었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책을 읽었다. 공지영이 지리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쓴 책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훈훈한 내용의 책이었다. 책에 자주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버들치 시인'과 '낙장불입 시인'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왠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주소지가 하동군 악양면이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가보면 누굴 만나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났다.
부산서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서 3시간 정도 달려 하동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먼저 지리산에 대해 정보를 얻기 위해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라는 곳에 찾아갔다. 센터에서 지도를 받았다. 지리산은 생각보다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악양면까지 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본격적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록잎으로 물든 푸르른 숲이 우거진 둘레길을 상상했으나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스팔트 길로 시작이 되더니 좀 더 걸어올라 갔을 땐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 뿐이었다. 계절적으로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걸었던 둘레길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평일이라 사람도 없었다. 오며가며 사람 구경하는 게 또 다른 재미인데 그런 재미도 없이 길만 따라 걸었다. 잠깐 쉬기도 하고 적당한 식당을 찾아 식사도 하며 혼자만의 걷기 여행을 즐겼다.
몇 시간 걷다보니 어느새 하늘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다행히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버들치 시인과 낙장불입 시인이 산다는 악양면에 도착하긴 했지만 정확한 주소를 알고 찾아간 게 아니었기에 더 이상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다. 난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동네에 가로수 등불이 없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휴대폰까지 배터리가 다 돼서 꺼져버리고 말았다. 잘 수 있을 만한 숙소도 보이지 않았고 길거리에 사람도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마을 쪽으로 더 올라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4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근처에 잠을 잘 만한 곳이 있을까요?"
"여기 근처에는 잘 데 없어요. 저 위에 올라가면 뭐 하나 있다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네."
"아 그래요?ㅠㅠ 잘 곳을 찾고 있는데 날이 어두워져서 어디 가지고 못하겠고 큰일이네요."
발을 동동 구르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 남자가 내게 말했다.
"아니면 근처에 마을 회관이 있는데 거기서 잘래요?"
그 말이 얼마나 반갑던지 마치 잃어버린 지갑을 다시 찾은 것마냥 기뻤다. 그제야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을회관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40대 남성은 마을 부이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대화를 나눠보니 억센 성격같으면서도 꽤나 순수한 사람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혼자라는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서가 아니었나 싶다. 처음 만났을 때 여리여리하게 말하는 나를 착하게 봐준 것 같고 이런 내가 자신을 잘 따를 거라 생각하고 회관으로 데려간 것도 같았다.
어쨌든 부이장님을 따라 마을 회관으로 들어갔다. 불은 꺼져있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씻고 바로 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이장님이 내게 말했다.
"근처에 아는 형님 집에 가서 술 한 잔 할 건데? 같이 갈래요?"
종일 걷다보니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
"저는 그냥 쉴게요."
부이장이 말했다.
"같이 가요."
거절하기가 어려워 결국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이장을 따라 나섰다. 5분 정도 걸어 부이장의 아는 형네 집에 도착했다. 부이장은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좀 그랬는지 지인인 형에게는 나를 고향 후배라고 소개했다. 그 말을 들은 부이장의 동네 아는 형은 '너한테 언제 저런 고향후배가 있었냐'라는 눈빛으로 부이장과 나를 번갈아봤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술상을 차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 옆에 뻘쭘하게 앉아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한 방에서 같이 앉아있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뻥튀기 과자가 이렇게 맛있었나?
술상 위에는 안주로 뻥튀기 과자가 한 봉지 있었다. 평소에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과자인데 그날따라 얼마나 먹고 싶던지 과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녁을 굶은 터라 더 먹고 싶었다. '한 번 먹어보라고 말을 왜 안 하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그때 과자를 먹으라며 나에게 과자 몇 개를 쥐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한 주먹 쥐어서 입 안에 다 털어넣고 싶었지만 얻어 먹는 입장이라 그러기도 민망했다. 그냥 한 개씩 집어서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과자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과자에 감탄하긴 실로 오랜만이었다. 먹는 순간 입 안에서 녹는 음식은 소고기가 유일한 줄 알았는데 뻥튀기 과자 역시도 입 안에서 녹을 정도로 꿀맛이었다.
과자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2시간 정도 있다가 부이장과 함께 형네 집을 나와 다시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빨리 가서 누워 자고 싶었다. '이제 드디어 진짜 잘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마을회관에 도착했을 쯤 부이장이 내게 말했다.
"현아. 행님이랑 같이 시내가서 한 잔 더 할래?"
너무 피곤해서 어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너무 피곤해요. 먼저 자면 안 될까요?"
내 말은 들은 부이장이 말했다.
"야 임마 행님이 가자믄 가야지 무슨 말이 많노? 으잉? 딱 한 잔만 더 하자. 빨리 가자."
그랬다. 부이장은 많~~이 취해있었다. 몸은 비틀거렸고 혀는 꼬여있었다.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택시를 불러타서는 15분 거리에 있는 시내로 나갔다.ㅜ.ㅜ
시내에 도착해 부이장을 따라 들어간 술집은 다름아닌 노래주점이었다. 부이장이 자주가는 단골집인 듯했다. 부이장은 술을 주문하고 도우미도 한 명 불렀다. 몇 분 뒤 술과 안주와 함께 도우미도 함께 들어왔다. 부이장은 도우미를 자기 옆에 앉히더니 갑자기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둥 사는 게 왜 이렇냐는둥 이러쿵저러쿵 신세한탄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여놓았다. 처음 와본 지리산, 처음 만난 마을 부이장인 40대 남자, 낯선 노래주점과 그리고 부이장 옆에서 얘기를 들어주며 맞장구를 쳐주던 도우미, 그 옆에서 뻘쭘하게 앉아있던 나.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부이장은 신세한탄을, 나는 안주로 나온 과일만 먹으며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고 곧바로 주점을 나왔다. 이제 드디어 회관으로 가서 잘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이장은 또 다른 말로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현아. 피곤한데 그냥 근처에서 방 잡고 자자."
엥? 방을 잡자니? 하..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순간이었다. 혼자서라도 마을회관에 가서 잘까도 했지만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가기가 좀 그랬다. 주소를 몰라 찾아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이장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렇게 신식도 아닌 구식도 아닌 그저그런 모텔 방을 잡았다. 부이장은 들어가자마자 뻗었고 나는 그 옆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랑 모텔에서 단 둘이 이게 뭔 일이냔 말인가...'
참으로 황당했지만 많이 피곤했던 터라 어느새 나는 부이장 옆에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부이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진 후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갑자기 술을 마시러 가자는 것도 방을 잡고 자자는 것도 다 황당하고 어이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해준 것만큼은 고마웠다. 그 부이장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진짜 밖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뻥튀기 과자랑 술 대신 따뜻한 저녁밥 한 끼를 사줬다면 정말 최고였겠지만 그래도 이 만한 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서 만난 시인을 실제로 만나기 위해 떠난지리산 여행이었다. 정확한 주소도 모른채 무작정 찾아갔으니 만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될 걸 알면서도 아무런 계획도 정보도 없이 찾아간 건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런 무모함 덕분에 지리산둘레길을 걸어볼 수 있었고 섬진강이 어우러진 하동의 풍경도 맛볼 수 있었다.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남긴 짧지만 재미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