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고전은 늘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스무 살의 나와 마흔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입니다. 《마흔의 고전》은 세계문학전집 속 고전들을 다시 읽으며, 마흔에만 가능한 해석과 사유를 기록하는 연재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지나쳤던 문장, 공감하지 못했던 인물,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읽었던 장면을 다시 바라봅니다.
각 회차에서는 고전 한 권을 다루되 줄거리 해설보다 ‘읽다가 멈춘 지점’, ’지금이라서 동의할 수 없어진 순간’, ‘마흔의 시선으로 새롭게 생긴 질문’에 집중합니다. 고전을 통해 위로에 머무르기보다 사유로 나아가고, 삶에 필요한 태도를 선택하고자 합니다.)
스무 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무너진 절망이 안타까웠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태도가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흔에 읽은 지금, 그 사랑이 정말 순정이었을까? 의문이 든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로테를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감정에 매달린 집착이었을까.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한다. 유부녀가 되어버린,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이 점점 로테를 향하기보다, 로테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으로 수렴되어 보인다. 감정이 증폭되면서 베르테르의 세계는 단순해진다. 사랑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믿음. 사랑이 좌절되면 삶 역시 의미를 잃는다는 사고방식. 그 극단 앞에서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았다기보다 선택할 수 없게 된 상태에 가깝다.
특히 잔인한 장면은 그가 죽음을 결심하며 권총을 로테에게서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대상에게서 파멸의 도구를 건네받는 장면은, 폭력에 가깝다. 로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품은 끝내 로테의 내면을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 로테는 사랑받는 대상이었을 뿐, 사랑하고 고민하는 주체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감당해야 했을 죄책감과 혼란, 베르테르가 남긴 무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중요한 것은 베르테르가 타인의 삶과 감정을 얼마나 자신의 서사 속에 끌어들였는가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짊어지게 만든 무게, 끝내 혼자 감당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비참함의 원천이 내 안에 있음을 느끼고 있네. 예전에 모든 행복의 원천이 내 가슴에 있었던 것처럼 말일세." 모든 행복의 원천이 자기 안에 있었던 것처럼, 불행 또한 그렇다. 베르테르는 알았지만, 너무 늦었을까. 감정이 전부가 된 사람에게 성찰은 구원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깝다. 이미 무너진 뒤에야 원인을 아는 일은 회복이 아니라 종결이다.
베르테르는 로테의 남편, 알베르트와의 대화에서
"점점 불안감이 커져서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마저 빼앗겨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침착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불행한 사람의 상태를 파악한다는 것도 헛된 일이고, 그에게 충고를 한다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베르테르는 스스로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불안에 잠식된 인간은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생각 대신 감정이 판단하고, 감정은 언제나 가장 극단적인 결론을 선택한다.
불안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는다. 견딜 수 없는 감정 앞에서 삶을 단순화한다. 사랑 아니면 죽음, 성공 아니면 실패, 의미 아니면 무의미. 그 이분법 속에서 타인의 말은 닿지 않고 이성은 늦게 도착한다. 베르테르에게 충고가 무력했던 이유는, 이미 들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흔에 읽는 베르테르의 슬픔은 위험하다. 지고지순은 아니다. 감정 하나로 세계를 단순화한 인간의 초상으로 보인다. 삶은 언제나 복잡하고 사랑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삶의 모든 자리를 그 사람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채워진 자리는 결국 비워질 수밖에 없고 그 공백을 견딜 힘은 남지 않는다.
베르테르가 포기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이다. 흔들리더라도 살아남는 선택, 사랑하면서도 나를 남기는 선택. 그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낭만의 교과서는 아닌 것 같다.
고전이 차갑게 읽힌다. 사랑이 삶의 전부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감정은 삶을 대신할 수 없다.
베르테르가 끝내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랑과 삶 사이에 거리를 두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