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프란츠 카프카

by 다정한 태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했다. 작가는 그레고르가 갑자기 벌레가 된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책을 덮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부분이 독자를 끌고 가는 힘처럼 느껴졌다.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욕망보다 책임을 앞세우며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벌레가 된 뒤에도 그레고르는 가장 먼저 출근을 걱정한다. 지각하면 상사가 뭐라고 할지, 거래처에 피해가 가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한다. 몸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생각은 그대로다. 마흔이 되어 다시 읽으니, 이 장면이 유독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성취보다 책임이 먼저 떠오르는 나이가 되었다.

그레고르는 여전히 가족을 사랑한다. 이해받고 싶어 하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상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다. 소통이 끊기자 그는 '불쌍한 가족 구성원'에서 '부담스러운 존재'로 이동한다. 돌봄은 곧 의무가 되었다. 그리고 의무는 빠르게 짜증으로 변한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의 등에 박혀 썩어가는 장면은 폭력적이지만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그 썩은 사과를 빼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레고르는 사과를 등에 단 채로 살다가 죽는다. 방치된 고통은 고의적 폭력보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동생 그레테는 처음엔 먹이를 챙기고 방을 치워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저건 더 이상 오빠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인간이 아니라는 규정은 관계를 정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 말 한마디로 책임도 미안함도 함께 사라진다. 한때 자신을 위해 일했던 사람을 지워내는 데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다.


가족은 그레고르의 희생에 감사했을까. 처음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지속된 헌신은 곧 당연함이 된다. 카프카는 이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준다. 인간은 사람을 기억하기보다 역할을 기억한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것은 실패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성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에게 '사람'이 아니라 '벌이'였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잃는 순간 존재가 지워졌다.

그레고르는 마지막에 죽지만, 그의 죽음은 그 순간에 시작되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사회적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실제의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고립이다. 고립은 소리 없이 사람을 마르게 만든다.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 마지막 장면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죽음 이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후회도 죄책감도 없다. 최소한의 참회는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카프카는 끝까지 냉정하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없어도 되는 존재'를 지워버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악의가 아니라 안도의 얼굴로 가능하다는 사실까지.


이제 마지막 장면을 다르게 읽는다. 가족들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다. 짐을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누군가를 애도하면서도 동시에 다음 계획을 세운다. 슬픔과 안도가 공존하는 것이 삶이다.

변신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말들이 쌓이고 해명할 기회를 잃은 시간이 길어질 때, 우리는 아주 천천히 변한다. 그레고르가 어느 날 깨어나 벌레였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천천히 벌레가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날 아침, 그것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침묵 속에서 홀로 굳어가는 삶은 이미 변신이 시작된 삶이다.

모두 누군가의 그레고르이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그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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