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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임 Jun 18. 2021

파도의 높이 1.2m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

5일 간의서핑 실패기

서핑 슈트를 입고, 롱보드를 끌고 바다 앞에 섰다. 포말이 발등을 덮었다. 서퍼 샵에 있었던 서퍼분들은 오늘 파도가 좋은 파도라고 했다. 좋은 파도란 파도가 일정하게 들어오는 파도를 말한다. 문제는 서퍼분들이 좋다고 하는 파도와 초보자인 나에게 좋은 파도는 달랐다는 것이다.


객기를 부렸다. 5일 중에 3번째 날,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바다에 들어가 봐야 되지는 않을까 싶었다. 바다 앞에 섰다. 내 키는 159cm 그냥 봤을 때는 파도가 낮아 보였다. 이 정도면 나도 갈 수 있지 않을까. 발등을 덮는 포말의 힘이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파도가 발을 지나 다시 바다로 돌아갈 때 발뒤꿈치가 점점 모래 사이로 들어가는 걸 느꼈다. 철썩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파도를 뚫고 가봐야겠다. 보드 위에 올라갔다. 짠 물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겁이 없었다. 일단 들어갔다. 어느 정도 갔을까. 파도 힘이 세서 사실 초보자인 내가 갈 수 있는 수준은 한계가 있었다. 이 정도면 꽤 많이 온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고 뒤를 봤다. 생각보다 한참 멀리 와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연습을 해볼까? 하고 보드에서 내려 방향을 틀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발이 닿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밖에서 보는 파도와 바다 안에서 보는 파도는 차원이 달랐다.

밖에서의 내 키는 159cm. 120cm짜리 파도는 낮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바다 안에서는 달랐다.


발이 닿지 않는다는 건 바다의 깊이가 나보다 높다는 걸 의미했다. 보드에 매달리듯 떠있는 나의 키는 겨우 30cm 머리만 밖에 나와있는 수준이었다. 그때 나보다 높은 키를 가진채 밀려오는 파도가 너무 거대해 보였다.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파도는 4번-5번 웨이브로 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보드에 올라 아무리 육지로 나아가려고 팔을 휘저어 봐도 파도가 끌어당기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파도가 올 때마다 내 몸의 의지가 아니라 바다에 의지에 맡긴 채 파도 안에서 뒹굴거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보드는 미친 듯이 돌아갔고, 내 몸도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닷속으로 잠겼다가 보드 위로 올라왔다. 


바다의 일렁거림이 몸에 닿았다. 내 머리 위를 덮쳐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코로 숨을 내뿜었다. 입으로 소금을 들이마셨다. 다시 머리를 수면 위로 내밀었다. 또다시 그림자가 졌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의 웨이브가 왔다. 정신이 없었다. 발버둥 치는 것조차 지쳐갔다. 이 웨이브를 빠져나갈 자신이 점점 사라졌다.

 

한 20분 정도를 바다에 휘말려 있었던 것 같다.

저 멀리 서핑 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Y가 보였다. Y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와서 나 좀 구해줘.  나 이제 너무 힘들어. 보드에 매달려 있는 것조차 지쳐 거의 팔만 얹고 있는 수준이었다. 폐에 물이 차는 것만 같았다. 몸이 점점 바다 아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Y는 나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놀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 점점 지쳐갈 때쯤 K가 왔다. K도 정신이 없었다. 이런 파도는 처음이라고 했다. 언니 괜찮아요? 물었다. 아니,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파도에 떠밀려 우리 둘은 멀어졌다. 어느새 저 멀리 K는 앞으로 나아갔다.



포말이 많다는 건 파도 힘이 세다는 뜻이다

가지 마. 살려줘.

살려줘. 살려달라고.


한 번 더 내 얼굴 위로 바닷물이 쏟아져 내렸다. 짠 물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수면 위에 올라와 눈을 뜨면 보드를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손이 보였다.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에 무색하게도 보드는 파도가 올 때마다 뒤집혔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

살려줘. 

나도 모르는 신에게 빌었다. 살려주세요.


호흡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다리와 함께 돌돌 말려 있는 리시를 풀어야만 했다. 웨이브가 다시 오기 전, 일렁이는 바다 위에서 이미 물 때문에 쪼글거리는 손가락으로 보드를 돌렸다. 시간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 타이밍에 엉켜버린 리시를 풀지 않으면 내 다리는 보드에 매달려 있을 거고 다시 한번 파도에 통돌이를 당해야 했다.


리시를 풀었다. 이런 미친 스포츠를 대체 누가 시작한 걸까 원초적 의문이 들었다. 옛날에는 보드도 없고 리시도 없이 나뭇조각 위에서 파도를 탔을 텐데. 살아있는 사람이 신기한 거 아닌가. 


보드 위에 올라탔다. 보드의 옆면으로 파도를 맞으면 보드가 뒤집힌다는 걸 몸소 느꼈기 때문에 보드를 일자로 하려고 노력했다. 파도가 왔다. 다행히 테일에 제대로 맞았는지 미친듯한 속도로 나를 밀었다. 체감상 롤러코스터보다 빠른 기분이었다.


제대로 된 파도를 잡아탔는지 한 번에 육지까지 도착했다.


착지는 더러웠다. 다리 힘이 풀리고, 팔에는 기운이 빠져 착지를 제대로 할 힘이 없었다. 데굴데굴 모래 위에서 보드랑 뒤엉킨 채 굴렀다. 다시 한번 빠질까 봐 정신 차리고 보드를 잡고 모래 위로 올라왔다.


물을 토하듯 뱉어냈다. 트림이 나왔다.

조금만 더 바다에 있었으면 위랑 폐에 물이 가득 들어찼겠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 서핑하는 걸 보겠다고 저 멀리 라인업에 가 있는 서퍼들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서핑을 한 7-8년 정도 했다고 하는 언니가 보드를 끌고 우리에게 왔다. 나를 보더니 엄청 겁먹었나 보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네.


입술이 새파랬다.


생명에 위험을 느끼고 살려달라고 소리쳐본 건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었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찾으면서 그렇게 애타게. 


파도의 높이 1.2m

내 키보다 작은 파도 앞에서 나는 삶의 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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