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 승리로 공석이 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석을 150만 달러에 팔려고 한 블라고예비치 전 일리노이주 주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증거는 명백했지만, 그는 1년 반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며 결백을 주장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넷플릭스 ‘미디어 재판’에 출연한 그의 변호인은 전략이라 설명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바뀌었죠. ‘근데 있잖아.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결백을 알리려고 1년 반 동안 전국을 순회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였죠.” 재판이 시작될 무렵 여론조사에선 절반의 국민이 그의 무죄를 믿었다. 법정에선 유죄를 피할 순 없었지만, 정치인으로선 손해 본 게 없는 장사였다. 결국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인정하고 양보하면 손해 보는 시대가 온 것 같다. 10여 년 전 통했던 블라고예비치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선 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지난 3년 가까운 시간, 경찰과 검찰 수사, 법정 재판을 지켜보면 대형 사건일수록 피고인은 모두 “나는 잘못한 게 없다”는 전략을 썼다. 판사 앞에선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법정 밖 SNS에선 활발한 여론전을 펼쳤다.
전선은 확대됐다. 지지자들은 장외에서 결속을 다졌다. 유죄가 나와도 국민의 절반은 자기 편의 결백함을 믿었다. 갈등에 대한 대화법을 다룬 『다른 의견』을 쓴 이언 레슬리는 “SNS에서 메시지의 확산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내부에서 이뤄졌을 뿐 그 누구도 (서로 간의) 논쟁엔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대화법의 당연한 결말이다.
최근 화천대유와 고발사주 의혹을 취재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수사를 받는 모든 이들이 언론에 나와 결백함을 주장한다. 취재하면 할수록 “아, 그 사람이 해준 말은 거짓이었구나”라고 속이 쓰릴 때가 여러 번이다. 아직 너무 순진한 건지, 수천만 원을 투자하고 수백억 원을 챙겨간 이들이 신경쇠약이라며 결백함을 호소하면 괜히 마음이 쓰인다. 그리고 찾아낸 그들의 부동산은 모두 강남의 알짜배기뿐. 마음을 썼던 내가 괜스레 불쌍해진다. 검사 시절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촌철살인으로 비판하던 한 현직 의원은, 자신이 수사 대상에 오르자 “기억이 안 난다”며 억울해한다. 같은 명문대를 졸업해 법을 다루는 두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드라마까지 만들어진 그의 책을 보며 “이런 검사도 있구나”라고 생각한 내가 또 순진했던 걸까.
‘아무것도 인정하지 말라’.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유효한 대화법이다. 문제는 이 대화법의 퇴로가 없다는 것. 우린 오늘도 거짓에 갇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202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