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의 첫 페이지를 어떻게 채울까 고민하다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차를 몰아 안동으로 향했다. 차가운 1월의 공기, 멀고 한적한 길, 그리고 동행 없이 혼자 떠나는 여행. 누군가에게는 쓸쓸해 보일지 모를 이 조합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바쁜 일상의 소음을 뒤로하고, 오직 나만의 속도로 숨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동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는 병산서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이라는 명성답게, 겨울의 병산서원은 기대 이상의 고요를 품고 있었다. 잎을 모두 떨구고 알몸으로 선 고목 뒤로 흙마당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겨울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만대루에 올라서니 낙동강과 병산이 7폭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여름의 화려한 배롱나무꽃 대신, 맑고 투명한 겨울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 앉아 바람 소리만 듣고 있노라니, 엉켰던 생각들이 실타래 풀리듯 스르륵 가라앉았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왜 이곳에 머물렀는지, 자연과 하나 된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고요해진 마음을 안고 발길을 옮겨 인근의 한옥 마을로 향했다. 검은 기와지붕 아래 단단하게 서 있는 나무 기둥들, 그리고 맨발로 밟는 대청마루의 서늘함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웠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창밖의 산자락을 바라보는 시간. 세상사가 멀어지고 오로지 '지금, 여기'의 나만 남는 듯한 평화가 찾아왔다.
가라앉은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준 것은 안동의 별미, 찜닭이었다. 진한 간장 국물에 푹 졸여진 닭고기와 당면을 한 입 가득 넣으니, 몸속 깊은 곳까지 온기가 스며들었다. 혼자 먹기에 조금 많은 양이었지만, 단짠단짠 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먹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포만감을 느꼈다.
여행의 마지막 의식은 안동의 이름난 빵가게들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맘모스제과의 유명한 크림치즈빵부터 유자 파운드까지, 종이봉투 가득 빵을 사 모았다. 손에 든 봉투가 묵직해질수록 왠지 모를 든든함이 느껴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하나씩 꺼내 먹는 달콤한 빵은 새해 첫 여행의 여운을 길게 늘여주는 기분 좋은 마침표였다.
추워도, 멀어도, 혼자라도 떠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의 고즈넉함은 새해의 불안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단단한 평안을 채워주었다.
올해는 이렇게 가끔, 마음이 시끄러울 때마다 나를 위해 기꺼이 길을 나서고 싶다. 텅 빈 장바구니에 새해의 다짐 대신, 고요한 풍경과 달콤한 빵 몇 조각을 담아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만한 한 해가 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