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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Dec 21. 2022

조던 헨더슨, 평범함이 주는 감동

 세계적인 명문 클럽에서 10년 넘게 뛰며 주장으로서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트로피를 들어 올린, 그리고 잉글랜드 대표팀 소속으로 월드컵에 세 번이나 참가한 선수에게 평범하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매우 상대적인 표현이다. 조던 헨더슨은 확실히 리버풀FC 동료인 모하메드 살라나 버질 반 다이크처럼 자기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라 언급되는 선수는 아니다. (잠깐이라도 그런 적이 없다.) 스타성으로 따지면 전임 주장이자 여전히 리버풀의 아이콘인 스티븐 제라드에 한참 못 미치고, 그가 업어 키운(아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보다도 떨어지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에 대해 화려한 동료들에 가려진 과소평가된(underrated) 선수라 말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열심히 뛰는 것 말고는 별 볼 일 없는 과대평가된(overrated) 선수라 말하기도 한다. 양쪽 평가를 퉁치면 헨더슨은 평범하고 어중간한 보통의(mediocre) 선수가 된다.


 2011년 리버풀 입단 당시의 조던 헨더슨이 내게 준 인상도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앳되고 조금 수줍은 듯한 젊은 미드필더. 요정 같이 생김(귀가 크고 뾰족해서).’ 수줍은 인상과 달리 경기장에서는 상당히 의욕적이었던 헨더슨이 몇 년 뒤 리버풀의 부주장이 돼 스티븐 제라드의 후계자로 지목받을 때까지도 나는 그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았다. 제라드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아쉬움과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무렴 보통의 인간이라면 제라드로부터 이어받은 주장 완장의 무게를 이겨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헨더슨이 주장이 된 후에도 그에 대한 내 응원은 약간의 짠함과 약간의 의심이 공존하는, 한 발을 빼고 물러서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앞서 제라드에게 빠져든 경위가 십 분도 채 안 됐을 편집 영상 하나에 주문에라도 걸린 듯 전적인 신뢰와 지지를 다짐했던 것이라는 점과 대조적이다.


 그렇기에 10년이 넘은 이 시점에 내가 조던 헨더슨에 대해 가진 애정이 꽤나 깊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나름의 프로세스가 필요했다. 왜 이렇게 이 선수가 (더) 잘했으면 좋겠고, (더) 인정받았으면 좋겠는지, 왜 이렇게 이 선수가 찬사를 받으면 기쁘고, 이 선수를 평가 절하하는 인간들을 보면 짜증이 나는지, 합당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우선, 선수로서 조던 헨더슨이 가진 최대 강점은 (그를 폄하하는 사람들조차 인정하듯) 열심히 뛰는 것이다. 열심이라니, 정말 진부하고 평범한 표현이다. 원래 나는 ‘열심히 말고 잘’ 하자는 주의라, 열심이라든지 최선이라든지 노력이라든지 하는 표현은 재미도 감동도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헨더슨의 열심에 마음이 움직였다. 아마도 그의 꾸준함 때문일 것이다. 꾸준이라니, 또한 정말 진부하고 평범한 표현이다.


 조던 헨더슨은 참 (정말 진부하고 평범하게도) 꾸준히 열심인 선수다.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경기의 중요도가 높든 안 높든, 매 경기에 꾸준하다. 여기서 꾸준함이란 폼(form)의 꾸준함이 아닌 태도(attitude)의 꾸준함이다. 마음가짐이나 자세의 꾸준함라고도 할 수 있겠다. 폼의 등락이야 누구에게든 생기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은 태도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고 만나는 사람이 늘어가면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 무언가를 꾸준히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다. 누구나 그렇게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게으름보다 두려움일 것이다. 노력과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다. 결과의 불확실성과 실패에 대한 공포가 매 순간 앞을 가로막는다.


 용감하게도, 조던 헨더슨은 꾸준히 열심이다. 그것이 헨더슨이 가진 재능이다. 어쩌면 사실 다른 어떤 재능보다도 특별하고 비범한 재능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간 동안(어쩌면 지금도) 받아온 외부로부터의 비난이나 혹평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분명 그는 괴물이라든지 천재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 수식어가 붙는 선수가 아닌데, 요즘 들어 나는 그의 재능에 경이를 느낀다.


 조던 헨더슨을 놀랍게 만드는 또 다른 슈퍼 파워는 리더십이다. 또 한 번 진부한 단어가 나와버렸다. 하지만 정말이다. 좋은 리더가 되는 것, 좋은 리더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기에 그렇다. 헨더슨의  전현 동료들이 그를 묘사할 때 종종 쓰는 표현이 ‘selfless’인데, 여기서 그의 리더십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리더다.


 축구팀을 모자이크 공예에 비유하자면, 조던 헨더슨은 저마다 개성 강한 타일(선수)들 사이의 틈을 메워 모자이크를 완성시키는 줄눈 같은 존재다. 화려하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팀을 팀답게 만드는 존재. 그는 그 역할도 그답게 참 꾸준히 열심히 하는데, 전술적으로도 그렇지만 단적으로는 훈련장에서나 경기장에서나 쉬지 않고 목청껏 콜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그렇다. 팬데믹으로 인한 무관중 경기가 이어질 당시 이 부분이 여실히 드러나 좀 놀랐다. 자기 플레이도 바쁜데 끊임없이 동료들을 격려하고, 다독이고, 혼도 냈다가, 위로하고, 칭찬하고… ‘도대체 뭐가 널 그렇게까지 하게 만드는 거니? 그건 어디서 나오는 힘이니?’


 나는 그가 그렇게 자기 일에 몰입하고 헌신할 수 있는 것이, 그래서 결과적으로 가장 경쟁적인 축구 리그에서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그가 인터뷰에서 종종 이야기하듯 자신감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악, 또 평범한 단어다.) 자신감. 말이 쉽지 인간의 평생 과제 아닌지. 세간의 박한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기 할 일을 꾸준히 열심히 해나가는 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조던 헨더슨은 때때로 안타까울 정도로 겸손한(최근 몇 년간 리버풀이 이룬 모든 성취는 뛰어난 동료들 덕분이며 자신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식의 발언) 한편, ‘네 선발 출전에 의문을 표하는 의견들이 있었다’는 말에 ‘누가?’라며 반문하거나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일 것 같은데’라는 질문에 ‘와우!’하며 발끈하기도 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답변은 당연히 자신은 현재에 충실하며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이고 늘 준비가 돼있다는 식이다. 정말 재미없다. 근데 감동적이다.


 더불어 조던 헨더슨은 차별에 반대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여자축구 선수들이 이 방면으로 거의 투사인 반면에 남자축구에서는 이런 경우를 잘 못 봤다. (최근에야 조금씩 느는 중이다.) 헨더슨은 기존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는 수준(관련 인터뷰를 맡아 놓고 하는 편)을 넘어서, 부당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먼저 나서서 비판하기도 하고, 약자 또는 지역사회와 연대하면서 다른 선수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몇몇 인터뷰를 통해서는 그가 백인 남성으로서 가진 기득권과 특권을 인식하고 스스로 경계하고 있음이 느껴져 인상 깊었다(당연한 것이지만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봤기에). 이런 면에서 그가 선수이자 유명인으로서 가진 선한 영향력(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가 선한 보통의 인간으로서 실천하는 일들은 세계 최고의 누군가가 하는 일들에 비해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그가 보통의 인간들을 위한 롤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선수들이, 나아가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이 박수받고 인정받고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드라진 곳의 그늘에서 성실히 몫을 해내며 세상을 굴리는 사람들. 노력 그 자체의 가치를 갈고닦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잊히지 않아야 한다. 폄하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바라는 좋은 사회란 그런 사회다. 축구는 이미 극도로 상업화, 자본화, 서열화된 산업이고 이 사회 역시 그렇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계산될 수 없고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존재해야 한다. 그 가치들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 역시. 조던 헨더슨 같은 평범하지만 사실 비범한 선수들이 주는 메시지다.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어떤 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영감을 얻고, 그의 성취에 기뻐하고, 그에 비춰 나를 돌아보는 과정쯤이라면. 이역만리에서 연고라고는 1도 없는 축구 클럽을 응원하는 일도 보람되다. 얼마 더 지나면 스티븐 제라드를 떠나보낼 때처럼 또 아쉬운 이별을 준비해야겠지만, 거기서도 배움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저 의미 없는 바람이 하나 있는데, 그가 나보다 어리다는 걸 알지만 존경의 의미를 담아… "Hendo, please adop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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