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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랭킹과 여성인권의 상관관계

by 태정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인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학술적 의미는 거의 없음을 밝혀둔다. 나는 지난 7월 스위스에서 열린 2025 UEFA 여자유로를 중계를 통해 지켜보다가 내 오랜 궁금증을 새삼 떠올렸다.


여자축구 FIFA 랭킹과 국제 성평등 지수 순위를 나란히 놓고 보면 대략 비슷하지 않을까? 여성인권이 높은 나라가 여성의 스포츠 참여율도 높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겠지만, FIFA 랭킹과 성평등 순위를 단순 비교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이번 여자유로가 역대 최다 관중과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감탄과 부러움에 배가 아플 지경이 된 나는 그간의 귀찮음을 이겨내고 엑셀을 켰다.


활용한 지표

여자축구 FIFA 랭킹 : 2025년 8월 기준

성불평등지수 GII(Gender Inequality Index) : 유엔개발계획(UNDP) 2025년 보고서

성격차지수 GGI(Global Gender Gap Index) : 세계경제포럼(WEF) 2025년 보고서

편의상 세 가지 지표가 모두 있는 나라들만 데이터에 포함시켰다.

영국은 잉글랜드의 FIFA 랭킹으로 퉁쳤다(SORRY!).


GII(가로축)와 FIFA 랭킹(세로축)의 상관관계
GGI(가로축)와 FIFA 랭킹(세로축)의 상관관계
GII와 GGI의 중앙값(가로축)과 FIFA 랭킹(세로축)의 상관관계


예상대로 성불평등지수(GII)와 성격차지수(GGI) 모두 FIFA 랭킹과 양의 상관관계로 나타났다. GGI보다는 GII가 FIFA 랭킹과 좀 더 유의미한 상관관계로 보인다. 각 점들이 추세선에 더 가깝게 분포돼 있다. GII와 GGI의 중앙값을 넣었더니 더 그럴듯한 그래프가 나왔다.


GII는 여성의 생식건강(모성사망비, 청소년출산율)에 대한 절대평가가 포함된 지표이기 때문에 보통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들이 상위권에 많이 분포돼 있다. GGI는 말 그대로 남녀 간 격차에 집중한 상대평가 지표다. 측정 방식에 차이가 있다 보니 두 지표가 큰 차이를 보이는 나라도 있다. (예: 한국. GII 12위, GGI 101위) GII가 FIFA 랭킹과 좀 더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먹고살아야 축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프 왼쪽아래에 몰려 있는 점들은 당연하게도 유럽 강대국들이다. FIFA 랭킹도 높고 성평등 순위도 높은 나라들. 흥미로운 쪽은 오히려 추세선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이다. 국제 성평등 지수 순위는 높은 편인데 FIFA 랭킹은 낮은 나라들은 싱가포르, 몰도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등 대부분 인구가 비교적 적은 나라들이라 납득이 간다.


FIFA 랭킹은 높은 편인데 성평등 순위는 낮은 편인 나라들 중에는 브라질(FIFA 7위, GII 96위, GGI 72위), 콜롬비아(FIFA 18위, GII 98위, GGI 41위), 나이지리아(FIFA 36위, GII 171위, GGI 124위)처럼 축구가 종교에 가까운 인기 스포츠인 나라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도(아님) 동북아시아 3국, 한국(FIFA 21위, GII 12위, GGI 101위), 일본(FIFA 8위, GII 22위, GGI 118위), 중국(FIFA 16위, GII 41위, GGI 103위)이 있다. 북한(FIFA 10위)은 GII와 GGI 지표가 없어 데이터에서 빠졌지만 아마도 추세선에서 멀리멀리 떨어져 있을 테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 여성인권도 높고 축구도 잘하는 유럽 강대국들을 부러워하자는 거냐. 그것만은 아니다. 사실 지금에야 성평등 강국으로 칭송받는 나라들이지, 그 나라들 역시 여성들에게서 축구를 뺏으려는 유구한 전통과 역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번 여자유로 우승으로 2연속 유럽 챔피언을 차지한 잉글랜드를 보라. 잉글랜드 여자축구에는 '잃어버린 50년'이 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1921년부터 1971년까지 여자축구를 금지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축구는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같잖은 이유를 댔는데, 실은 여자축구의 높아지는 인기에 남자축구 수익을 뺏기기 싫었기 때문이다. 졸렬 그 자체다.


그 모든 흑역사를 뒤로 하고 여자축구가 국제적인 스포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불과 20세기 후반부터인 것을 생각하면 그 성장세가 대단하다. 특히 최근 10년 사이 유럽 여자축구는 실력과 인기 면에서 모두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고, 거기에는 경제적 자본은 물론 사회·문화적 자본의 힘이 바탕이 됐다. 난 그 사회·문화적 자본의 핵심이 여성인권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정신 차린) 잉글랜드 축구협회를 비롯해 유럽 각국의 축구협회들은 2010년대 들어 여자축구 활성화를 위한 다각적 투자와 캠페인을 진행했는데, 제일 밑바탕으로 둔 것이 바로 여성 차별 철폐와 여성 스포츠 인식 개선이었다.


“여자축구는 현대 사회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자유롭게 하고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차별과 같은 근본적 사회 문제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하나의 표현이다.”


당시 독일 축구협회의 성명 중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이다. 여성인권의 향상과 여자축구의 발전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꿰뚫는 문장이라 간직하고 있다. 단지 여성인권 상승이 여자축구를 활성화를 가져오는 것뿐 아니라, 여자축구 활성화가 여성인권 상승을 촉진하며 함께 갈 수 있다는 것. 10년 전에는 개념적으로만 여겼지만 이제는 그게 진짜, 진짜라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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