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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Feb 21. 2023

혼자 머리 자르는 여자

이발의 날

 십수 년 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이맘때쯤 귀밑 3cm 단발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당시 내가 다닐 중학교의 학생 두발 규정(여학생의 경우 머리카락이 귀밑 5cm를 넘으면 안 됨)에 맞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전근대적인 규정인데, 솔직히 이때의 나는 반항심보다 설렘이 더 컸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가 마치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되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게 된 나는 미용실 거울을 통해 머리카락이 귀밑 3cm에 맞춰 일자로 잘려나가는 모습을 비장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짧은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목 뒤가 시원하고 목 위가 가벼워서 좋았다. 입학 후에는 두발 규정이 조금 완화돼 머리카락을 묶었을 때 나온 꽁지의 길이가 10cm를 넘지 않으면 되게 됐는데, 그래도 나는 미용실 갈 타이밍을 놓쳤을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짧은 머리를 하고 다녔다.


 이후 진학한 고등학교에서는 꽁지의 길이가 15cm까지 허용됐다. 두발 단속이 있을 때면 학생들 사이에는 최대한 꽁지를 짧아 보이게 머리카락을 묶는 다양한 노하우가 전수됐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단속을 통과하는 긴 머리 학생들이 늘어나자, 학생부에서는 단속 시에 머리카락을 완전히 풀었다가 다시 묶도록 지시하는 방법으로 규정 위반자를 색출해 냈다. 이때도 짧은 머리였던 나는 이 모든 사회 실험의 과정에서 관찰자 역할이었다. 중학생 때와 달라진 점은 일자 단발이 아닌 층 단발이었다는 점 정도다. 나름 당시 유행했던 샤기컷 또는 울프컷으로 멋을 낸 스타일이었다.


 이 사회 실험을 관찰하며 느낀 것은 일련의 과정이 긴 머리에 대한 집착을 심어준다는 것이었다. 가질 수 없으면 더 갖고 싶어지는 심리랄까? 규정에 반해 어떻게든 긴 머리를 고수하던 여학생들은 성인이 돼서도 그 집착을 이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 하나도 재미없지만) 사실 성인이 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체제와 대립하는 반항아들이었던  긴 머리 여학생들은 거리낌 없이 사회에 녹아들었고, 학창 시절 두발 단속 프리 패스였던  짧은 머리 여학생들은 새로운 거리낌이 생겼다. 사회에 들어선 순간부터 질문 아닌 질문들을 받게 된 것이다. ‘머리 왜 안 길러?’, ‘머리 좀 길러보련?’, ‘머리 기르면 예쁠 것 같은데?’ 하... 긴 머리가 대체 뭐길래. 하도 그렇게들 긴 머리에 집착을 하니 궁금하기도 해서 머리카락을 등허리까지 길러본 적이 있다. 두 번. 유지 기간은 길지 않았다. 덥고 무겁고 불편하고 귀찮아서 싫었다. 결국 미용실에 가서 짧게 쳐달라고 주문하자 예상된 반응이 돌아왔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깝지 않으세요? 조금만 자르시죠.’ 하... 긴 머리가 대체 뭐길래.


 유지를 위해 미용실에 비교적 자주 가야 한다는 점은 짧은 머리의 유일한 단점이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단골 미용실을 둔 적이 없는데, 지금 사는 동네에서 찾은 한 개인 미용실에는 여러 번 방문했다. 아무리 짧은 머리를 요청해도 군소리 없이 바로 잘라줬기 때문이다. 첫 방문 날 투블록을 요청했는데, 곧장 이발기를 갖다 대는 미용사 선생님의 시원스러움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여자 커트비와 남자 커트비의 가격 차이도 슬쩍 눈감을 수 있었는데, 다행히 두 번째 방문부터는 남자 커트비만 받으셨다. 안타깝게도 그 미용실은 이전인지 폐업인지 모르게 어느 날 사라졌다. 이후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몇 번 찾았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커트비가 나날이 올라서 더 그랬다. 마땅한 미용실을 탐색하는 과정도 지겨워서,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미용실에 가지 않게 됐다. 나는 이제 혼자 머리를 자른다.


 처음에는 문구용 가위로 깔짝대다가 좀 자신감이 붙고 나서는 다이소에서 미용 가위를 사 왔다. 커트가위와 숱가위. 요령은 별 것 없다. 알몸으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벽거울과 손거울을 활용해 이쪽저쪽 살펴가며 가위질을 하면 된다. 실수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먹고살다 보면 또 자란다. 대충 다 다듬어지면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치우고 샤워로 마무리한다. 나름 재미도 있다. 가위 소리도 좋고 머리카락이 잘려 떨어지는 느낌도 좋다. 무엇보다 자르고 싶으면 아무 때나 자를 수 있어서 참 편하다.


 지금 내 머리는 셀프 이발로 유지하기에 제일 쉬운 일자 단발이다. 십수 년 전 이맘때쯤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 더 짧은 머리가 좋지만 아직 능력 부족이다. 사실 제일 하고 싶은 스타일은 삭발이다. 투블록을 유지하던 시절에 사둔 이발기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 가능한데, 아직 용기를 못 내고 있다. 엄마, 아빠가 매우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투블록을 한 나를 보고 ‘중학교 축구부 애 같다’며 진심으로 혐오하는 표정을 지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하.하.하.) 그래도 언젠가는 꼭 삭발을 하고 싶다. 민머리 상태로 편하고 자유롭게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내 오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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