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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Dec 15. 2022

유랑과 정착 사이

제주의 날 4

 ‘어린 왕자’ 읽고 여행자를 꿈꿨고, ‘사막별 여행자’ 읽고 유목민의 삶을 동경했다. 얼마나 대단히 억압적이고 구속적인 환경에서 자랐는지 따진다면 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자유라는 개념을 알게  때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는 자유를 생각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같았고, 그래서 언제나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내게 자유는 행복의 결정체와 같은 것이었다. 유랑하는 삶을 꿈꾼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여행자와 유목민의 삶은 자유를 어느 정도 실체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나의 유랑은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의  원룸으로 이사를 오던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서울에서 십수 년을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때로는 서울과 낯가림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나름 집주인 복이 있는 것인지  원룸 이후로 이사는   번만 했는데, ‘ 이라고 부르기가 그나마  어색한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처음이다. (물론 정말로 ‘  아니다.) ‘  마련이나 ‘하우스 푸어같은 화두가 가 속한 세대의 현실로 치닫기 시작할 때도 나는 외려 거리를 두는 편이었는데, 그것은 어차피   것에 대한 포기이기도 부당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낙관적인 방식으로는 서울에서 이렇게 저렇게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살다가 느지막이 때가 되면 고향에 돌아가 이렇게든 저렇게든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때면 돌아갈 곳이 없는 서울 사람들이 가엾게도 느껴지곤 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어떤 연유에서건 돌아갈 곳을 상정하고서야 유랑하기 시작한다니 모순이다. 어쩌면 그런 모순을 견디는 것도 유랑의 일부일지 모르겠다. 여행자가 순간순간 집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는 것처럼, 정착자는 유랑을 꿈꾸고 유랑자는 정착을 소원한다. 정착의 달콤함은 그만큼 중독적이다. 내가 현재의 ‘ 에서 혼자 살기의 자유를 느껴버린 것도 그렇다. 가용 한도 내에서  생활 패턴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자랑하는 ‘  안락함은 떨쳐내기가 힘들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마음 한편에 늘 ‘내 집’이 있었다. 특히 빨래가 필요할 때 그랬다. 손빨래는 곧 죽어도 하기 싫어서 빨랫감을 지고 그나마 가까운 셀프빨래방을 찾아갈 때 그랬다. 비용이 결코 싸지도 않길래 생각했다. 아, 손빨래 못해서 유랑 못하겠는데? 손빨래 습관을 들여야 하나? 하, 그래도 손빨래는 싫어. 유랑하는 삶을 꿈꾸지만 손빨래를 싫어하고 추위를 많이 타며 위생에 민감한 사람. 꿈은 언제나 막연하고 현실은 항상 합리화로 가득하다. 그래도 제주도를 시계 방향으로 대략 한 바퀴 돌고 나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자유를 갈망한다.


 여행의 말미에 제주도 서북쪽에서 보낸 며칠 동안 매일 해넘이를 봤다. 낮에는 어제 안 걸어본 곳을 걷고 안 먹어본 것을 먹고 안 생각해본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해가 지는 것을 지켜봤다. 하늘이 세상의 모든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한참 보다가, 해가 수평선으로 꼴딱 넘어가기 직전에 “안녕” 인사했다. 그러고 나면 썩 괜찮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형 인간이 못되니 해 뜨는 것은 못 봐도, 매일 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삶이라면. 이런 삶이라면 어디라도 괜찮겠다는, 이렇게 살면 어디서든 살 수 있겠다는, 어떤 희망과 자신감을 느꼈다. 애초의 꿈대로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다 ‘어린 왕자’를 만나는 날이 정말 올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랑과 정착 사이 어드메의 삶에서 잊지 않고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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