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에서
비 오는 날이면 아무것도 하기 싫잖아.
그날도 사실 그랬어.
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간 동네에서는 젖은 땅 냄새가 났어.
거기에 그가 있었어.
그의 나이를 바로 가늠하기가 어려웠어.
그는 빛 바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정말 오래된 옷인 건지 유행에 맞춰 일부러 빈티지 풍을 낸 건지 알 수 없었거든.
어쨌든 그날 날씨와 퍽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달까?
그와 뭐라고 첫인사를 했던가?
사실 그것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는 요란하지 않았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시작했어.
그와의 대화는 마인드맵 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어.
왜,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많이 했던, 생각나는대로 지도 그리던 것 말야.
그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비 오는 날의 길거리 사진을 보여주더니, 일본의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지. 그리곤 교토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
그러다 대뜸 세이치 야마모토의 팔세토라는 앨범을 들려주더라. 아무 설명도 없이. 나중에서야 세이치 야마모토가 교토와 오사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뮤지션이라는 걸 알았어.
그는 또, 일본식 가정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러다 예쁜 그릇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
두서는 없었는데 맥락은 있었다.
나는 그에게 특별히 듣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고,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어.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영화관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지.
세상에서 한 발짝쯤 떨어져서 세상과 다른 시간을 보내는 느낌.
그와의 시간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그가 더 좋았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세상으로 돌아오고 나니 그가 더 보고 싶다.
친구야, 바쁘게 살다 보면 또 그가 떠오르겠지. 서울에서도 그런 이를 만날 수 있을까?
그는 교토를 떠나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나 소개팅 좀 시켜줘.
2015년 10월
케이분샤 이치조지점을 다녀와서
*케이분샤 이치조지점은 2010년 7월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서점 10곳 중 한 곳이다. 1975년 개업한 이 서점은 교토 중심가에서 꽤 떨어져 있음에도 전국 각지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일반 대형서점처럼 장르별, 제목순, 작가순으로 책을 진열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주제를 가지고 책들의 맥락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진열하는 것이 특징이다. 교토시 사쿄구에는 케이분샤 이치조지점 외에도 지역 출신 사람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