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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Sep 20. 2023

미국 출장 첫날 떠오른 생각들

“Hurry Up”과 “Take It Easy”가 만났을 때


미국에 출장을 왔다. 호텔 체크인을 하려는데 줄이 길다. 한국 같으면 손님이 기다리는 대기시간을 줄이기 위해 직원들이 어떻게든 빨리빨리 처리하려고 애쓸 텐데 여기서는 다르다. 마치 오랜만에 헤어졌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처음 보는 손님을 붙잡고 ’ 비행은 어땠냐? 어디서 왔냐? 여기는 처음이냐?‘ 등등을 물으면서 여유롭게 수다를 떨고 있다. 뒤에 길게 줄을 선 손님이 점점 많아지건 말건 그딴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겨우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왔다. 가방을 풀어보니 내일 입을 셔츠가 많이 구겨져 있다. 다림질을 해야겠다 싶어 방안을 살펴보았는데  다리미는 있지만 다리미 받침대가 없다. 고객서비스에 전화를 해서 하나 갖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5분, 10분, 20분... ‘이거, 설마 까먹은 거야?’ 한참을 참으며 기다리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전화를 했다. 결국 다리미 받침대는 30분을 넘게 기다려서야 받을 수 있었다. 금방 올 줄 알고 화장실도 안 가고 참고 있었던 게 화가 났다.


다림질을 마치고, 샤워도 간단히 하고 나서 내일 발표할 자료를 손보기 위해 컴퓨터를 열었다. 그리고 이메일로 전송해 둔 파일을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넷이 너무너무 느리다. 그렇다. 미국은 체크인도 느리고, 다리미 받침대 배달도 느리고, 인터넷 마저 느리다. ㅠㅠ




사실 미국에서의 삶의 속도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20년 전에 유학 오면서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대충 일주일이면 다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정착에 필요한 일들이 실제로는 몇 달이나 걸렸던 경험을 통해 배웠던 것이다. 은행계좌 개설하고, 전화 신청하고, 인터넷 깔고, 가스 전기 수도 연결하고, 주민등록 비슷한 것도 하는 등등... 한국에서는 하루 만에도 충분히 할 수 있고 길어야 2-3일을 넘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미국에서는 한 달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맨 처음 배우는 한국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속도감각이 남다르긴 한 모양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국제전화번호가 +82인 것도 “빨리빨리”의 영향이라고 하겠는가. 한국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빠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고, 한국의 첨단기업들이 빠르게 선두기업들과의 기술격차를 좁히는 것 등도 다 이런 한국인의 “빨리빨리” DNA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부작용들도 많다. 사람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 힘들어지고 높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과 중년층의 사망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등, 그리 자랑스럽지 않은 ’ 세계 최고‘ 기록들도 어쩌면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한국 사회 내에서도 지나치게 빠른 속도와 높은 경쟁 등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이는 일들도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은 ‘패스트푸드’가 아닌 ‘슬로푸드’를 찾고,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는 젊은이를 그린 <리틀포레스트> 같은 영화들이 인기를 얻고, ’ 슬로시티(Slow City)'라는 이름이 붙여진 도시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대표적인 한국어(?)가 “빨리빨리”인데, 정작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표적인 한국관광상품이 ’템플스테이‘인 것은 어찌 보면 좀 아이러니하다.




문득 미국의 점원이 느리고, 서비스가 느리고, 인터넷이 느리다고 힘들어하는 ‘내가 오히려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해본다. 이렇게 느려터지고 비효율적인 것 같아도 그래도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는 최강국은 아직 미국 아닌가. 도대체 왜 그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이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미국인들의 의사소통은 집단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이다. 점원이 손님 붙잡고 일종의 ’ 맞춤형(?)‘ 수다를 떠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회사에서도 개인적인 1:1 면담이나 소통이 활발하다. 그리고 소통의 과정에서 모르는 것이 있다면 물어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고, 생각이 다르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장려되는 분위기다. 아직도 집단주의의 성향이 일부 남아있는 한국에서는 질문하면 내 무식이 탄로 날까 봐 눈치가 보이고, 괜히 다른 생각을 이야기했다가는 나만 혼날까 봐, 혹은 회의 시간만 더 길어질까 봐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비즈니스 현장에 오래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내 성향의 문제인지 나도 빠른 것을 좋아하고, 느린 것에 대해서는 참을성이 부족한 편이다. 점원의 수다 때문에 계산대에서 오래 줄을 서 있어야 하거나 다리미 받침대 하나 받는데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나를 금방 지치게 만들고 참을성의 바닥을 드러내게 하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업무 진척이 생각처럼 제때에 되지 않거나 지시한 사항에 대한 반응이 느릴 때면 모르긴 해도 나의 표정은 나의 조급함과 불편함을 표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치를 내려놓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 속도‘를 ’효율적인 의사소통‘과 잘 버무리는 일인 것 같다. <넛지(Nudge)>라는 책에서도 알려주듯이 정보를 잘 제공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통제감‘을 느끼고, 결과적으로 똑같은 시간이 걸리는 일에 대해서도 덜 조급하게 느낀다. 조급함과 참을성의 부족은 불확실성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 중간중간에 얼마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또 만일 지연이 예상된다면 왜 얼마나 지연이 될 것인지 등을 서로 잘 소통하기만 해 줘도 기다림은 덜 힘들어질 수 있다. 아하! 한국의 ’빨리빨리‘와 미국의 ’chit chat (격식 없는 소통)‘의 아름다운 콜라보다.


https://brunch.co.kr/@taejin-ham/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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