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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Sep 16. 2023

시간이 부리는 인간관계의 마법

"Hello Taejin, how are you?"

비즈니스 목적으로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 LinkedIn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J였다. 10년 전, 내가 이전 회사의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지사장으로 있을 때 함께 일했던 동료다.

“I’m not sure if you remember me.”

자기를 기억하냐고? 기억하다 뿐이겠는가. 늘 잘 지내는지 궁금했었는데. 그는 당시 나에게 직접 보고하는 리더십팀 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어린 친구였다. 탁월한 총명함과 인성 때문에 내 손으로 직접 발탁했던 인재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J는 이번에 한국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는데 시간이 되면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물론이지. 10년 만의 재회인데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서 만나야지.'

나는 냉큼 저녁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에서 우리는 대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큰 빌딩의 로비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게 인사했다.

“Hey~~. Great to see you!!!”

10년의 세월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어제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인 것처럼 스스럼없으면서도 늘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반가웠다.




시간이 부리는 마법은 참 신기하다. 대개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관계가 서먹하고 소원해져 있기 마련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테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떨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관계가 오히려 더 깊어지고 단단해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대부분의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상하기 마련이지만, 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맛과 향이 깊어지는 것처럼.


예전에 첫 직장의 선배였던 C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도 그랬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려 25년 전쯤이었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고, C 선배는 그동안 사업에 뛰어들어 이제는 크고 잘 나가는 회사의 어엿한 대표가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러 회사로 찾아갔을 때, 나는 사무실 반대편 끝에 서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C 선배~!!!”

반가운 마음에 나는 그를 향해 달려갔고, C 선배도 나를 두 팔 벌려 안으며 반겨주었다. 흡사 두 중년의 아저씨가 찍는 브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넓은 사무실에서 조용하게 일하고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이 처음이라는 J를 데리고 고깃집으로 갔다. 한국 전통주(?) 쏘맥으로 목을 축인 다음 우리는 고기가 타는 것도 모른 채 지난 10년의 시간을 신나게 함께 복기했다. 그는 내가 말레이시아를 떠난 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헤쳐나갔고, 지금은 미국 본사에서 잘 나가는 중역이 되어 있었다. 수줍어하며 나에게 명함을 건네는데, 그것을 받아 드는 내 마음에 왠지 모를 뿌듯함과 대견함이 뿜뿜 솟아나는 듯했다.


저녁을 대충 끝내면서 남은 일정에 대해 물었더니 J는 바쁜 일정 때문에 딱히 서울을 구경할 시간은 없었고, 주말에는 바로 출국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 그래선 안되지.”

나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J가 한국에서 본 것이라고는 사무실과 호텔뿐이었다고 하지 않도록 그를 데리고 가까운

경복궁으로 향했다. 요즘 경복궁의 야간 관람은 원래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외국인에 한해서는 선착순 200명까지 현장구매가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외국인 덕 좀 보자’며 J에게 표를 사게 했다.



야간의 경복궁은 조명 때문에 특히나 더 아름다웠다. 카메라를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J는 문득 광화문쪽을 뒤돌아보더니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전통 건축물의 뒤로 현대적인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너무도 특이하고 이질적이면서도 의외로(?) 조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I’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before. (난 이런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보통 외국의 도시들을 가봐도 오래된 건축물들이 모여있는 지역과 현대식 건물들이 밀집된 지역은 대개 구분되어 있지, 서울처럼 이들이 이렇게 한데 섞여 있는 곳은 흔치가 않다. 마치 600년 전의 건축물들과 21세기의 건물들이 시간여행을 하듯 한 곳에서 중첩된 모습이다.


문득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쳐다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25년 전, 혹은 10년 전의 동료를 보면  너무도 멋지게 변한 그들의 지금 모습과 함께 오래전에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느낌, 그 모습이 묘하게 겹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도, 잊히기보다 오히려 더 그리워지고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일부러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특히 직장에서 일로 만난 사이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저 오늘 하루,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진심을 다 하려고 할 뿐이다. 


이번 주말에는 그동안 안부가 궁금했던 지인들에게 잘 살고 있느냐고 DM이라도 날려볼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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