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린 다음 날, 강남 한복판. 건강검진을 받으러 왔다. 사실 연초에 했으면 좋았을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연말에 오고 말았다. 매년 그렇다. 나처럼 미루고 미룬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검진센터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나도 게으르지만, 사람들은 참 비슷하다.
검진센터 대기실 곳곳에는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대기 중인 검사자 성별과 나이가 함께 표시된다. 놀랍게도 내가 거의 제일 나이가 많다. 이럴 수가. 직장이 바로 근처라서 그런가, 30대가 특히 많다. 어쩐지 젊은이들 틈에 끼어 앉은 뜬금없는 아저씨가 된 기분이다. 헛웃음이 난다.
검진 항목이 너무 많아 예약하기 전에 고민이 됐었다. 이왕 하는 것, 자동차 정기검사 하듯 가능한 한 모든 걸 체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의대 교수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이 친구 왈, “그거 다 쓸데없어. 오히려 몸에 해로울 수도 있어.” ‘이 친구, 의사 맞나?’ 싶었다. 하기야 나도 친구들이 몸에 좋은 건강식품 추천해 달라고 하면 “그런 거 별로 소용없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친구들은 비슷한 말을 한다. “너 약사 맞아?”
건강검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수면내시경이다. 내시경실로 가는 길, 아랫도리가 휑한 검사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게 꽤나 신경 쓰인다. 검사를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려 눕고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겨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좀 민망했다. 다행히 직원들은 참 친절하다. 한 사람 한 사람 기계처럼 반복하는 말일 텐데도, 상냥하게 말해주니 부끄러우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축 늘어진 동물처럼 그들에게 몸을 맡기게 될 것이다. 잘 부탁합니다.
직원이 손가락 끝에 산소포화도 측정 집게를 끼우고, 수면유도제를 정맥으로 주사한다. 약이 밀려들어오면서 가슴이 점점 뜨끈해지는 느낌이 든다. 문득 검진 전 작성했던 동의서가 떠오른다. 혹시라도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게 내 마지막 순간인 건가? 잠깐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감상에 빠져볼까 하는 순간... 주변의 사람들 목소리에 살포시 잠에서 깬다. 벌써 모든 게 끝났고 나는 이미 회복실이다. 참 신기하다. 뱃속의 뻐근한 느낌이, 검사가 끝났고 실제로 내시경이 나의 내장을 한바탕 휘젓고 갔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로 북적였던 검진센터는 이제 텅 비어 있다. 내가 거의 마지막 수검자였던 모양이다. 검진센터에서 주는 식권을 갖고서 근처 황태해장국 집으로 향한다. 어젯밤부터 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있었으니 배가 많이 고프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하지만 일단은 황태해장국 한 그릇이 급하다. 건강은 내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2024년 11월)
Cover Image: @owenbeard,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