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태진 Mar 02. 2020

이직(혹은 실직)의 추억

인맥이 넓지 않다면


2020년. 직장을 옮겼다. 국내 대기업, 다국적 제약기업 (Big Pharma), 다국적 바이오텍 (Big Biotech)을 거쳐서 이제 바이오벤처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바이오벤처를 선택했냐고. 그 질문에 길게 대답할 수도 있고 짧게 대답할 수도 있다. 긴 버전(version)에는, 크게는 내가 몸담았던 업계와 산업에 대한 내 나름의 시선에서부터 작게는 직업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바램까지 다양한 것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짧은 version은 이렇다. 이 길이 훗날 돌아봤을 때 더 멋진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다고... Go with decisions that will make a good story (멋진 이야기로 기억될 결정을 택하라).




세 번의 이직은 그 동기가 매번 달랐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직은 항상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유학을 위해 내가 자발적으로 퇴사했던 첫 번째 이직이나, 오랜 고민을 통해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던 세 번째 이직에 비해 두 번째 이직은 특히나 스트레스가 심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공황장애를 겪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에 가끔씩 아무리 숨을 깊이 들이쉬어도 머리에 산소공급이 안된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마치 폐에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들이마신 공기가 그냥 어딘가로 새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두려운 마음에 계속 깊은 숨을 들이쉬다 보면 한편으로는 과호흡 때문에 머리가 아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호흡곤란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당시에 나는 회사에서 10년 가까이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고, 회사가 나를 내 보내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본사에서 시작된 구조조정의 바람은 점점 쓰나미처럼 밀려오더니 결국 나를 신임하던 지역본부의 수장마저 회사를 떠나고, 급기야 지사들의 통폐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구직 전선으로 내몰렸다... 망연자실했다. 자존심도 상했다. 잠시 어려운 시기를 겪고 나면 새로운 곳에 다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려고 노력했지만, 나와 가족의 미래에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불확실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두려웠었다. 당시 나는 오랜 기간 외국에서 근무했었기에 한국에 딱히 이렇다 할 인맥도 별로 없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데 커다란 약점이었다. 또 회사에 너무나 충성했던 덕분에(?) 회사 밖의 사람들은 별로 알고 지내지 않았던 점 또한 내가 갑자기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데 대단히 불리한 요소였다. 구직활동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주위에 잘 알고 지내던, 도움을 줄 만한 지인들에게 이리저리 연락을 해 보았다. 다들 내 걱정을 하며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맥과 네트워크는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그들을 통해서 얻어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답답하고 우울한 시기가 꽤 흐른 뒤에 돌파구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예전에 미국에서 근무할 당시 잠시 같은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옛 동료로부터였다. 혹시 조언이나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연락 부탁한다는 나의 어찌 보면 평범한 메시지에 그가 지인을 한 명 소개해 줬는데, 그 지인이 마침 나의 구직에 도움이 되는 결정적인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교 그라노베터(Granovetter) 교수의 그 유명한 "약한 연결고리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이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유용한, 그러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정보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나와 사회적으로 매우 약하게 연결된 사람에게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몇 개월간의 불확실성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싱가포르에서 새 직장에 처음 출근하던 날. 나는 붐비는 지하철역 구내를 다른 수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떠밀리 듯 걸어가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늘 회사 차량으로 여유롭게 출퇴근하던 나였지만, 30도가 넘는 싱가포르 시내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걸어서 출퇴근을 하면서도 어딘가 매일 아침 갈 곳이 다시금 생겼다는 느낌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었다. 평생을 직장인으로 살아온 나에겐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은 마치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밝은 모습만을 겉으로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면에 숨어있는 어둡고 불안하고 약한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마치 밝은 한쪽 면만을 늘 지구로 향하고 있어서 그 뒷면은 보여주지 않는 달처럼. 나도 그랬다. 덕분에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떤 이들은 내가 한 번도 어려움을 겪은 적 없이 늘 승승장구하고 마치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한 것 마냥 화려하게 경력을 키워온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역경과 어려움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늘 승승장구하기만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때의 경험 이후로 직장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아무리 안정적으로 보이는 상황도 언젠가 예기치 않게 급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 위치에서 늘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주변의 더 큰 변화에 늘 깨어있고 열려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곤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도 마찬가지다. 매일매일 스쳐 지나치는 수많은 크고 작은 인연들이 언제 어떤 형태로 발전하거나 변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대인관계를 좀 더 열어두고 사람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할 수 있을 때는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나 호의를 베풀려고도 한다. 그리고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마음이 잘 맞는 가까운 사람들과만 계속 어울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행여나 나 자신이 나만의 '이너써클(inner circle)'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기도 한다. 강한 연결고리(strong ties)를 더 강하게 하느라 약한 연결고리(weak ties)는 너무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요즘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창궐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ing)'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병의 전파를 늦추기 위해 사람들과의 접촉을 당분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나도 모처럼 주말에 아무 데도 안 나가고 오롯이 이틀을 '방콕'하며 이에 동참하는 중이다. 작가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어떤 사회 현상이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라고 이름 붙이고, 티핑포인트가 생기려면 '커넥터(Connector)'라고 명칭 한, 많은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을 전염병에 적용시켜 보자면 전파력이 강한 소위 '슈퍼 전파자'들이 일종의 Connector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Connector가 되는 것은 조심해야겠지만, 약한 연결고리(weak ties)들을 이어주는 Connector가 되는 것은 나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고 나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사회적 다가서기'에 좀 더 나서야겠다.


(2020년 3월)

이전 15화 기생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