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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자락, 파주 출판단지에서

파주가 무슨 시골이야… 이렇게 번화한 시골 봤어?

by 윤태진
겨울 아침, 출판단지 한 켠에 위치한 갈대 샛강에서


갈대 샛강 언덕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고민에 빠지려는데 사진동호회에서 나온 무리가 갈대 샛강 주위로 몰려든다. 팔뚝만 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대체 뭘 찍는 걸까? 렌즈가 향한 곳을 바라보지만 딱히 특별한 게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헤엄치고 있는 기러기인지, 오리인지를 찍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정체모를 철새들은 간절히 기다리는 렌즈들을 위해 날아줄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다들 참 부지런히 산다. 별생각 없어 보이는, 애초에 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어 보이는 새들을 찍으려고 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이 먼 곳 파주까지 달려왔다니 놀랍다. 비장함마저 넘치는 렌즈가 애처롭다.


"이런 시골에서 살기 싫다고."

"파주가 무슨 시골이야… 이렇게 번화한 시골 봤어? 얼마나 살기 좋은데."


아내와 싸울 때면 늘 반복되는 말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달라지는 거라곤 감정에 따른 억양의 높낮이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의 파주 예찬과 끈질긴 설득.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던 내가 파주를 예찬한다는 점은 서울 토박이 아내에게 설득력이 떨어졌다. 30년을 서울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산 아내는 파주의 맑은 공기 따위 없이도 잘 살아왔다고 쏘아붙인다. 덕분에 아내와의 논쟁은 언제나 힘겹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싸운다. 지지고 볶으며.


몇 년 전 결혼을 앞두고 서울에서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고 있을 때였다. 2억짜리 같은 1억짜리 아파트가 나올 리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헛된 희망을 안고 이런저런 매물들을 살펴보았다. 서울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도권도 좋고 더 멀리서도 다닐 각오가 있었다.

그러다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마치 우리의 결혼을 축복이라도 하듯 회사가 파주로 보금자리를 옮기기로 한 것이다. 회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전이었지만 오직 나만 기뻐했다. 물 좋고 공기 좋고 무엇보다 집값이 싼 파주라니. 2억 같은 1억짜리 아파트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1억짜리 아파트는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아내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졌다.

때론 주변 사람들이 말한다. 북한 가까이 있는 동네라 무섭지 않냐고. 통일 전망대도 근처에 있다고 하던데, 맑은 날엔 북한이 보이기도 하는 거냐고. 북한과 관련된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심심찮게 듣는다. 허무맹랑한 질문에 웃으며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실제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통일 전망대도 있고, 그곳에 가면 북한이 보이기도 한다. 30분 정도 더 달리면 임진각도 나오고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표지판과 길을 막고 있는 군인들도 만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가보지는 않았지만 정말 멀지 않은 곳에 북한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직접 가보지 않았으니 얼마나 걸리는지는 나도 모른다.

또 사람들이 묻는다. 전쟁 나면 북한이 바로 쳐들어 올 텐데 무섭지 않냐고. 뭐 죽기야 하겠어요 라고 대답하지만 속으론 이렇게 말한다. 서울을 공격하느라 파주는 그냥 지나치지 않겠냐고. 서울이 훨씬 더 중요한데 파주에서 뭣 하러 시간을 낭비하겠냐고.

북한이 이곳저곳으로 미사일을 쏘아댄다는 언론 보도를 접할 때면 정말 당장이라도 쳐들어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전쟁이 터지면 아이들을 둘러업고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고민해봐도 마땅히 도망갈 곳이 없다. 그러니 전쟁 따위 일어나선 안 된다. 우리 모두 행복하자고 외쳤던 한 가수의 노래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 평화롭자. 화목하자.

파주에 살며 애국자가 되어간다.


온갖 잡념에 시달리는 삶이지만 내가 사는 이 동네는 위로라도 하듯 언제나 한적하고 조용하다. 더구나 내가 일하는 출판단지는 높은 건물도 많지 않다. 보고 있자면 막힌 속이 뚫리는 기분이다. 그나마 높은 건물이라면 출판단지 가운데 위치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유일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곳이 출판단지에서 가장 번화했다는 일종의 ‘강남’이라던데. 파주까지 와서도 난 출판단지 끝자락 ‘강북’에 산다.


걱정 없이 단순하게 살고 싶은 인생인데 어쩌다 보니 하루하루 걱정 근심이 쌓여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갈등과 오해, 갖가지 책임에 피로까지 겹겹이 층을 이룬다.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고단함이 켜켜이 쌓인다.


내 마음 따위 뭐가 중요하냐는 듯 오늘따라 유난히 노을이 아름답다. 끝자락 파주에 서서 입술을 삐죽 내민다. 며칠째 가방에 아무렇게나 넣고 다니던 공책을 꺼내 어쩌면 파주가 별로일지 모른다고 적는다. 그럼 이제 난 어쩌지 라고도 쓴다. 그리고 이 글도 쓴다.



* 연재 글과 함께 실리는 출판단지의 사진들은 모두 직접 찍은 것임을 밝힙니다. 그 외 자료사진들은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퍼온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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