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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진 Nov 06. 2024

서로를 위해 애쓰는 세상

바튼 아카데미

  늘 그렇지만,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심지어 오늘 단 하루조차도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과 삶일지라도 언제나 나쁘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뜻밖의 기회와 행운이 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살게도 하고 또 어쩌면 기대했던 삶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그만큼이나 우리의 삶은 제멋대로라는 거다. 그러니 조금 아쉬울 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1970년대 미국의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자식을 잃은 아픔에 젖어 있는 주방장 ‘메리’, 세상에 나가기를 귀찮아하는 아니 두려워하는 역사 선생님 ‘폴’, 그리고 학교 기숙사에 혼자 남아,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입이 잔뜩 나온 덩치만 큰 아이 ‘털리. 이 사연 많은 세 사람의 어색한 동거가 불편하게 시작된다. 

  영화의 초반 털리는 이기적인 부모탓에 텅 빈 학교에 홀로 남게 된다. 그것도 사회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괴짜 선생님 폴과 함께.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여행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텐데, 나만 혼자 학교에 남아야 한다. 그것도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과 함께. 아마 학창 시절의 나였다면 울었을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엉엉 울었을 것이 분명하다. 슬픈 책을 읽으며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친구들 몰래 눈물을 훔칠 만큼 감수성이 풍부했던 나였으니, 분명 서러움에 눈물 흘렸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 세상은 서러운 아이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물론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지만 우린 열받으려고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이를 텅 빈 학교에 방치할리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털리는 자신의 방학이 얼마나 따뜻할지, 또 뜻밖의 일들로 얼마나 놀라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는 ‘자극’과 ‘소란스러움’이 없는 다소 소박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털리와 그의 단짝 ‘폴’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다.  

  우연히 참석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한 소녀를 만나 달콤한 키스를 나누는 ‘행운’을 시작으로 엉거주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크리스마스트리와 크리스마스에 절대 줘서는 안 되는 선물 '책', 그것도 명상록을 선물하는 선생님 폴과의 여행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우울증을 복용하는 두 남자는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간다. 성장과 변화, 상처의 보듬이 적절히 어우러진 이야기는 그야말로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마치 크리스마스 즈음의 풍성함과 관대함이 넘치는 세상처럼. 


  

  영화에서 눈에 띄는 건 폴의 ‘애씀’이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어른의 관심과 노력이 나이가 들어보니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어서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정과 주변인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지만, 그저 티 내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폴은 털리를 위해 애를 쓴다. 모두에게 미움받는, 자기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위태로워 보이는 남자는 나름 최선을 다한다. 스케이트를 태워주고, 볼링장과 극장을 가며 아이를 즐겁게 하려 노력한다. 그 방법이 서툴고 때론 엉망이지만 그의 노력을 보고 있자면 왠지 가슴이 간지럽다.  어른이 된 지금은 고맙기도 하다. 

  폴의 애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결국 털리의 아버지가 있는 병원에까지 함께하며 선생 이상의 역할을 묵묵히 해낸다. 이쯤 되면 털리는 자신을 짐짝 취급하는 부모와의 여행보다 지금이 몇 배는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털리에게 주어졌던 최악의 방학은 잊지 못할 방학이 된다.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잔인한 세상의 희망고문이라고 믿지만, 아주 가끔은 희망찬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러고 보니, 그래서 희망을 가지라는 것인가? 희박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으면 아주 가끔, 뜻밖의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희망차고 따뜻한 영화를 보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주 비뚤어진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 어쩌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한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는 중이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금 냉혹한 현실에서 깨어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안온하니 종종 찾아볼지도 모르겠다. 아니 찾아볼 일이 생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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