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모두 최악이 된다
새로운 이성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더 나은 유전자를 찾아 번식하려는 생물학적 본능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인간사에서는 그로 인한 ‘바람’이 하루 세끼 챙겨 먹듯 흔한 일이고 그로 인한 갈등은 뻔하다 못해 없으면 허전할 지경이다.
영화의 여주인공 율리는 그런 본능에 충실하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과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운명처럼 그 인연과의 만남이 반복되니, 유혹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지금의 연인과 권태로움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결국 율리는 원래의 연인과 헤어지길 결심하고 새로운 남자와의 사랑을 시작한다. 이때 불가피한 피해자와 그로 인한 슬픔은 필연적이다. 이들의 얽히고설킨 사랑과 상황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슬프고도 큰 일이지만 조금 떨어져 제삼자가 되어 바라보면 그저 그런, 세상 속의 흔한 일상일 뿐이다.
낯선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낯선 사람과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조금씩 감정을 나눠가는 단계. 서로의 모든 것이 궁금하고 눈길, 손짓 하나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경이로운 순간이지만 그래서 그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권태와 헤어짐이 더욱 극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권태가 찾아오면 또다시 낯선 사람에게 눈길이 가고야 만다는 인간의 본능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새로운 것은 늘 더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사랑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 율리는 그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것뿐이다. 자유를 찾아 원하는 데로 삶의 방향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런 변화와 결정이 옳은 것인지, 과연 더 나은 삶으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가 더 큰 행복을 얻었다면 그만이다. 하지만 율리의 현재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누구나 겪게 되는 성장통을 더 심하게 앓는 것일까?
인생의 방황도 기한이 있다. 예를 들자면 28세까지의 방황은 여유, 32세까지의 방황은 위험, 35세 이상의 방황은 망함. 이런 식으로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좀 더 안정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가혹하여 연습이 없다. 덕분에 조금 늦게 방황을 시작하거나 혹은 방황이 조금 길어지면 자칫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한 인생이 되기도 한다. 보통 이런 식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이직을 하다 경력도 없이 나이만 들어버린 만년 신입이 되어 기업에서 꺼리는 지원자가 되기도 하고, 낯선 사람에 대한 기대로 여러 연인을 만나다 진짜 좋았던 인연들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물론 이런 선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고 때론 새로운 경험과 도전의 일환으로 장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선택과 경험을 이 세상이 언제까지 용인해 주는지를 알 수 없다는 거다. 또 그 방황의 기한이 저마다 다르기에 누구의 조언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나의 방황은 짧았다. 이십 대 후반 힘들게, 운이 좋게 들어간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그리고 혹독한 사회를 경험하고 나서 객기와 도전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도전과 퇴사에 대한 갈망은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혔을 것이고 언젠가는, 좋지 못한 타이밍에 무모한 도전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무모한 도전이 대박이 되어 부자의 길로 인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인생과는 크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방황 혹은 도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가 져야 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나와 가족까지 함께 져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제는 그냥 상상만 한다. 혹은 영화와 소설 같은 작품들로 대리만족하며 살뿐이다. 사랑과 갈등, 헤어짐의 아픔까지, 이야기할 거리가 가득한 영화를 보고도 ‘방황은 적당히’라는 낭만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꼰대’가 되어버린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한때 낭만을 부르짖으며 사랑에 눈물짓던 젊은 시절의 나를 생각하니 더 그렇다. 맞다. 그럴 때도 있었다. 낭만이 밥 먹여 주는 줄 알았던 때가.
그래도 가끔은 바란다. 내가 먹진 못해도, 다른 누군가는 낭만으로 밥 먹고 사는 세상이길. 그의 노력으로 위태로워 보이는 낭만이 조금 더 오래 살아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