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문제는 인생을 바꾸게 할 중요한 미팅과 겹쳤다는 점이다. 그래서 망설인다. 당연히 사랑을 잡아야 하지 않겠냐고, 주저하는 남자를 향해 조언해보지만 내 말이 들릴리 없다. 결국 남자는 사랑을 고백할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 순간의 주인공이 되면 영화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망설일지도 모른다. 훈수를 잘 두던 사람도 정작 자신이 게임의 주인이 되면 악수(惡手)를 두게 되듯이 ‘내 일’이 되면 현명한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현명함이랑은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은 주인공 잭 말리는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돈보다는 진실이라니 이게 웬 조선시대 선비나 할 소리냔 말이다.
영화는 흥미로운 상상을 바탕으로 풀어낸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으로 오직 자신만이 그룹 비틀즈와 그들의 음악을 알 뿐 세상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모른다는 설정이다. 기억 속에서 잊혀진 게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 존재자체가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린 거다. 주인공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고 세상 답답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비틀즈의 성공과 영화를 자신이 누릴 수 있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들의 음악은 전설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니까. 그러니 이제 잭에게 필요한 것은 비틀즈의 음악을 얼마나 기억해낼 수 있냐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주인공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더구나 비틀즈의 음악을 더 없이 좋아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잭은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며, 비틀즈의 음악을 기록한다.
역시 비틀즈인가. 남자는 음반의 출시와 함께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다.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세상에 비틀즈의 노래를 알린다. 물론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이 아니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영화의 말미 결국 대중에게 진실을 말한다. 아니 대체 왜?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는 그룹도 아니고 그 누구도 피해보는 사람도 없는데? 또 진실을 말한다고 그걸 확인할 방법도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불필요한 죄책감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기회를 차버린다고? 물론 주인공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틀즈라는 전설적인 그룹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진실을 말하고 싶을 수는 있지만, 굳이?
이런 솔직함이 어쩌면 학습화된 사회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는 언제나 솔직해야 한다는, 어린시절부터 지독하게도 반복하여 배워온 탓에 죄의식을 느끼는 게 아닐까? 인간의 본성대로라면 서로를 속이고 헐뜯고 싸우고 잡아 먹는 게 당연하다. 의심의 여지도 없다.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진실’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아니냔 말이다.
의도가 의심스러운 진실함 덕분에 영원토록 기억될, 전설의 가수가 될 기회를 포기하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영화가 끝나고도 주인공이 포기한 부귀영화가 못내 아쉬웠다. 내가 기대한 해피엔딩은 사랑하는 연인과 음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좋은 집에 살며, 온갖 값비싼 물건들을 사고 비싼 음식들을 먹으러 해외 여행이나 설렁설렁 다니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풍요를 누리는 삶을 사는 모습인데, 이게 웬일이람. 이건 해피엔딩도 그렇다고 새드엔딩도 아닌 찝찝엔딩이랄까?
언젠가 나에게 잭과 같은 기회가 생기길, 그렇다면 난 반드시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꿈속에서라도 비틀즈가 되어볼 수 있길 바란다. 그런데 한 가지 큰 걸림돌은 나는 노래를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제기랄.